정죄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뉴스를 장식하는 것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비록 사이버 상이지만, 부정적인 상황의 주인공은 공개 처형을 당하게되며, 이들의 상태는 극도로 심각해지기도한다.
공격하는 사람은 일종의 쾌감을 느끼기도한다.
사이버 상에 공격적 댓글을 다는데 재미가 들린 사람은 습관적으로 댓글을 단다.
하지만 댓글을 실명으로한다면, 습관적으로 공격적 댓글을 다는 사람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비록 사이버 상이 아니더라도, 사회는 가십 거리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세상이 된다.
세상 사람 가운데에는 만나면 남의 얘기하고, 남의 세세한 것까지 흉보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상황은 교회에서는 비교적 절제되어있으며, 많은 사람이 덕을 세우는데 앞장 선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보면 교회도 세상 못지 않다.
세상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달라야한다.
세상에는 진리가 없기에, 정죄하고 가십거리를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의 판단은 심판하고 고소하고 정죄하는 성격을 지니고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죄에 대한 개념을 잘못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상은, 잘못된 행동 방식에 대한 것이다.
잘못된 행동 방식 때문에 잘못된 인간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짓는 행위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이미 정죄된 자이기에 남을 정죄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일종의 죄를 정하는 재판관이 하는 일의 속성을 지니고있다.
재판하는 행위는 자신은 의롭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울은 재판하는 행위 자체가 의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표면적인 행위에서는 판단하는 사람이 판단하는 대상과 다를 수 있겠지만, 속성에 있어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행위 이전에 존재의 속성에 대한 것이기에,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받는 사람이나 모두 한 가지 부류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표면적인 죄를 논하려고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좀 더 근본적인 내면의 죄에 대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의 존재론적인 죄와 행위로 인한 죄를 구분하는 잘못을 범하고있다.
이러한 구분은, 죄를 짓지 않는 자신은 의롭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면의 죄를 보지 못하고 정죄를 일삼는 바리세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칭하신 이유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자기 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에 대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거나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대상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복음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것에 대한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결코 성경을 근거로 남을 정죄할 수는 없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인간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있는 것이다.
윤리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이들은 인간의 본질보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이는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인식을 하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이다.
기독교 윤리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정죄에 앞장서면서 윤리를 말하고있지만, 이들의 신학에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개념이 없다.
교회의 부패는 행함의 실종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학이 실종된 교회에서 아무리 윤리를 강조한다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를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의에 취해있는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2장 1절에서의 바울의 경고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부정하고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유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경고이다.
정죄에 앞장서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을 망각하고, 복음을 행위에 관한 것으로 제한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다.
복음은 행위론 이전에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자들이나, 윤리를 말하는 신학자들의 신학은, 존재론까지 들어가지 못한 행위로 귀결되는 신학들이다.
세상이 정죄하는 것과 교회에서 기독교인이 정죄하는 기준이 같다면, 이들의 행위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드러내고, 드러난 죄를 통해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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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을 통한 긍정의 위험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정보를 공유하게되면서 나타나는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끊임없이 타인을 부정하는 상황이다.
특히 타인에 대하여 유난히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상황 가운데 한 가지로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불법의 흥행과 더불어 끊임없는 정죄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끊임없는 정죄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갈 뿐이다.
특히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을 긍정하는 수단으로 타인의 부정적 상황들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부정적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성도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이러한 부정적 상황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달려있다.
세상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정죄하기만 성도는 정죄하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를 하여야한다.
하지만 자칭 성도라하는 거짓된 이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편의 부정적 상황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더군다나 이들은 자신의 긍정적인 면도 곁들여서 드러내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한다.
이들은 타인의 부정적인 면을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나타내는 자신의 삶의 긍정적인 면은 도덕적인 관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부정을 통한 자신에 대한 긍정이 얼마나 심각한 악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들은 모르고있다.
특히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도덕적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부도덕을 질타하는 이들은 구약의 영역에 그쳐있거나 아니면 인본주의 신학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다.
신약에서는 은혜의 복음을 통하여 부정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하는 부정적인 면들은 인간이 근본적인 죄인임을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부정을 통한 정죄와 이를 통한 자신의 합리화는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할 복음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타인의 부정을 통한 자신의 긍정에 익숙한 이들은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바리세인들은 자신은 다르다고하면서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타인의 부정적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신학이 제대로된 사람들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을 들춰 내려고도 해서는 안되고 그러한 일이 공개되었을 때는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이 그들의 잘못된 신학때문이라고 정죄를 하면서 자신의 신학이 올바르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은혜의 복음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있음을 모를 뿐이다.
이들은 타인의 지지를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증명을 받으려고하지 않는다.
참된 성도는 타인의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부정을 돌아보아야한다.
특히 부정적 상황에 예민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경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부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부정적 상황이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학이 옳다고 말하지만 정작 잘못된 신학을 가진 사람은 비판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진실된 성도는 다른 이들을 부정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구해야한다.
(결론)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자신을 긍정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을 했다.
칼빈 교리의 핵심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부터 출발된다.
오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채찍을 들을 수가 없다.
타인을 부정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정죄이며 이들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들이다.
자식의 부정적인 모습을 본 부모가 쉽게 자식을 정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쉽게 정죄를 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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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 대한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성경에는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비슷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온다.
종종 비슷한 가사가 들어간 찬양을 부르면서도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문맥과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교리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명해주는 다음의 글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있다.
니케아 교회회의(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381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다. 또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을 갖고 계신다”고 진술했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조엘 비키 마크 존스, 399에서 인용)
이는 창세 전의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낳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낳았다”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계시켜주는 성경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5)
낳았다는 말씀의 의미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규명해주는 말씀이다.
낳기 위해서는 산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산고의 과정은 오랜 고통의 시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기까지의 수고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가나안에서의 고통의 세월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간이라는 오랜 산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산고의 고통은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마감이 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죽으시기까지 고통을 감당하신 것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낳으심
오늘 너를 낳았다는 것은 완료형을 뜻한다.
부활은 약속의 성취로서 이미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약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산고의 열매로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들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도 아들이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낳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낳으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썩어짐과 죽음에 대한 영원한 결별로서 이들에 대한 영원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들이신 그리스도
로마서에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심으로서 첫 째 아담의 잃어 버린 자리를 채우셨다.
누가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아들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셨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삼위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신의 형상을 회복시키신 것이며, 삼위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녀 삼으심으로,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녀를 되찾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은, 아들 안에 연합된 모든 성도들을 자녀 삼으셨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유대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유대 이스라엘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으며,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들이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시며, 예수의 부활하심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이스라엘이 되셔서 자신의 몸된 지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모으신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새 이스라엘의 탄생도 없었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소속될 나라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백성들의 탄생의 의미하며,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짐을 의미
한다.
맏형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맏형으로서 성도를 대표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아들은, 성도들을 부활을 통하여 자녀 삼으실 것에 대한 보증이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새 이스라엘의 백성의 백성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의 백성과 구별된다.
유대 이스라엘 백성은 본질적으로 죄인인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인 유대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시지 않으시고,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새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성도는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ㅣ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들로 낳으신 분이시다.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간추려 살펴본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새창조 사역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아들을 삼으셨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자녀의 상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산고의 고톤 가운데 낳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문을 여신 것이다.
성도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아들의 자격에 참여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기까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산의 고통을 담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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