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정치 #선악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1.16 :: 진리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
부정적 상황 2020. 1. 16. 12:35

진리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



들어가는 말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이 어떠한 죄악을 범하고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를 소유했다고해서 모두 다 자유케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사람은 살리기도하지만 죽이기도한다.

 

참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적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이 생명 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면서 아담 부부를 에덴에서 쫓아내신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는 주체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 부부는 자신들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스스로가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게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판단의 주체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왕권으로 다스리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관리하는 제사장직을 맡았음을 알려주고있다.

 

에초에 인간은 창조시부터 모든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로 창조되지 않았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가운데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으며, 모든 일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처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었던 모습과 대조를 보여 주신다.

 

진리를 소유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고하는 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려고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는 사람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이며, 둘째는 그 나무의 열매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 열매에 약효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선악을 알게된 것은 불순종에 따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 부부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되었다는 것은 스스로가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움직이겠다는 불순종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참조 사항일 뿐이지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교회 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가고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육신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며, 말씀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된 방식으로 적용시키기도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이러한 기복 신앙에 축복을 남발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도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기에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교회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을 한다.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 안에 나타나는 죄의 결과물로서,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끊임없는 먹는 죄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범죄한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났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만약을 가정을 하여 아담 부부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이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이는 영원한 지옥의 삶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고 기록하고있다.

 

아담은 에덴 성전에서 성령에 참여한바되었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피조 세계를 왕으로서 다스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으면서 에덴에서의 풍요를 맛보았지만, 처음 아담이 범한 죄로 죄인이 된 이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으로서의 교회에서 다시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성직자나 교인들의 타락, 다시 말하면 교회의 영역에서 자신들이 선악간에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결정권 자가 된다면,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가 없으시기에 이들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소유한 성도들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주체가 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 선악과를 먹는 행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정치 참여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 개인은 사회의 일원이면서 또한 교회의 일원이다.

 

성도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가 교회의 일원이라고 할지라도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서 마땅한 것이다.

 

성도의 정치 참여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참여하여야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서 정치 참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기에,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규정하는 자연법을 근거로 하여야한다.

 

자연법은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유지하는 규범으로서 교회의 성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규범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자연법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법, 즉 성경 말씀을 근거로 존재하고 움직여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택하신 자의 구원에 있다.

 

구원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행된다.

 

이 세상에 대한 보존은 아브라함 언약보다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한다.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최후의 심판 때까지 더 이상 노아의 홍수와 같은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노아 언약은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언약도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기관이다.

 

세상의 제도와 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세워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운행되는 교회와 자연법을 근거로 운행되는 사회 기관은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다른 목적으로 운행되고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지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에만 속하여있다.

 

성도와 달리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으로만 운행되어야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면 이는 자연법을 근거로하는 사회 기관에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을 강요하는 행위가 된다.

 

신앙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느 편에 서든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성전인 에덴에서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 되려했던 아담의 선악과 범죄와 같은 맥락에 서게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칼빈을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인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 행위를 하였던 것은 당시 유럽의 여러나라가 종교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룬 신정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정치는 목적과 운영체제가 다르기에 결코 어떠한 결론적 형태를 이루어낼 수 없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에덴에서 쫓겨났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을 넘어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결정권자 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에덴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곳이었다.

 

에덴은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도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에덴을 재연하고있듯이, 이 세상은 바벨론을 재연하고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나 공통점은 자신들이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최종적 결정권자인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범죄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잘못된 사회 체제를 직면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문화는 대부분 사악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라고 하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수동적이었지만 에스더의 정치 참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 멸절시키고자한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즉 자연법을 근거로한 백성으로서의 참여였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궁극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지만 이 세상 문화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했지만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만 적용한 것이며 결코 바벨론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상식적 논리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 적용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손에 잡혀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납득이 안되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시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이는 주권이 침해당하고 농락 당하는 일이기에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일이며,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 해방 전쟁을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더군다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고 어린 아이까지 다 죽이는 것은 인륜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자연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는 진리의 주체이시다.

 

진리는 인간이 절대화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 절대화시킨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법을 절대화시키고자한다면, 이는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와 한 가지이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사회법은 단지 인간 문화에서의 법일뿐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적용될 때에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될 때에는, 그 인간의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데서만 진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자 선악과를 범했지만 그는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었다.

 

참진리는 인간을 자유케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될 때에는, 이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자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될 때 인간은 사탄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허용 범위 안에서 적용될 때에만 인간은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었듯이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순종이 요구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영역을 침범한 아담은 더 이상 에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기에 에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은 또 다시 아담의 죄를 범하는 것이된다.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는 없다.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교회를 허무는 이들이며, 이들의 행위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