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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018. 12. 13. 14:48

교회의 부패와 인간의 죄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교회의 부패에 대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어왔던 문제이다.


최초로 교회를 만드신 예수님도 부패된 교회의 희생자이셨다.


최초로 부패한 교인은 가룟 유다였다.


교회의 부패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그 양상이 정도를 넘어서 보편성을 가진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은, 부패의 속도와 부패의 보편성과 교인 수의 급격한 감소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의 감소와 첨단문명의 발달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들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근원적인 문제가 교회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수 많은 개혁과 자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으로의 상황도 역시 점점 더 안좋아질 수 있고,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부패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고, 개혁을 외치기도하지만,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 부패의 현장이 바로 자신이 속해있는 현장이고, 바로 자신이 믿었던 이들 가운데 일어나고있으며, 심지어는 교회 개혁을 외쳤던 자기 자신이 부패의 현장 한 가운데 있기도한다는 사실이다.


이해하기 힘든 문제는, 꾸준하게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당사자가 바로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결과는 개혁의 주체들의 다툼과 분열이라는 결과를 보는 현실에 있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무리들 자신들이 다툼과 분열의 현장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교회 부패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는 왜 끊임없이 문제의 한 가운데 있어야하고,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사자마져도 문제의 주역의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교회의 부패에 대한 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은, 분명 그동안의 처방들이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수 많은 싸움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인식하거나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과 인간 스스로의 승리를 외치는 사건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패배하는 것으로서, 타락한 인간의 자존심은 자신의 패배를 용납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남에게 돌림으로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는 죄성을 가지고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용납이 안되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자기 완성을 위한 인간의 죄성은 교회에 모인 교인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상적인 접근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여야한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현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인간의 존재론적 죄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외면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선함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결과일 뿐이지,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인 이유는,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몸소 교회를 세우셨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기에 모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도는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체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속성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성도가 용서받은 것은 행위로서의 죄악 이전에 존대론적으로 죄인인 것레 대한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범죄를 하지 않아도 존재론적으로 죄인이기에 세례를 받아야하는 이유와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행위 이전에 존재론적인 현실이다.


성도는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은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심판에서 현재적으로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다.


육신이 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고,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거듭나 새사람이 된 성도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소욕을 다스려야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악된 육신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의 새 몸을 입을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성도라 할지라도 다스려야할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된 죄인은, 죄성을 가진 육신을 다스리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


하지만 죄성은 가진 육신은 어느 정도의 환경만 조성이 된다면,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고간다.


성도가 되었다고 환경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수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며 존경받아왔던 목회자도 어느날 한순간에 성추행 문제로 순식간에 몰락하기도한다.


세습의 문제에 휘말린 대형교회 목사들의 타락도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법이 사회법 위에 있다는 말로서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바벨탑과 같은 건물을 지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짓된 포장을 하는 교회의 대형화는 인간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이들은, 겸손의 자리로 옮겨갈 적절한 시기를 놓침으로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락하는 것이다.


타락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였던 것이다.


부패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환경을 만든 이들 모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질하는 이도 그 자리에 서면 예외없이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은 다르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다.


손가락질하거나 고발하는 것으로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


이미 부패할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은 인간 모두가 직면하는 상황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에서 할 일은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상황의 개선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인간이 투쟁하면서 나아지게하는 상황은 고무줄을 당기는 것 뿐이다.


고무줄은 상황만 주어지면 원위치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 대한 소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성도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육신의  소욕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윗의 눈물의 기도는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고통스러워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교회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이,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한다.


교회는 성도에게 삶의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공급처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서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곳이어야한다.


공예배에서의 설교 주제는 죄에 관한 것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복을 받는 복음이 아니라,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여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 만큼이나, 교회의 설교단에서는 죄에 관한 언급을 들어볼 수가 없다.


오히려 도덕적 선함을 드러내는 곳이 인기를 끌고있다.


유대인들의 도덕적 선함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다.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걱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십년간의 공예배에서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선포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교인들을 떠나가게만들고, 교회는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대부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무덤에 들어가야한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 어느 누구나 다를 바가 없이 똑같다.


인간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어느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다.


육신에 대한 죄성을 인식할 때, 자신의 육신이 시험에 들지 않게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근신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했지만, 부패한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자연법 앞에 서있는 모든 인간은 다른 이들의 죄를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하지만, 모든 인간은 파멸의 길을 가면서 자연법 앞에서 죄인임이 증명될 뿐이다.


인간은 첨단 문명을 통해서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려고하지만,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죄성은 단순한 불순종의 죄성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든 진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완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한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교인은,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교회 생활을 하며,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교회에서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는,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유사한 모습을 나타내기도한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리세린에게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오셨지만, 자신들이 죄인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열심이었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교회에서 열심인 교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의인이 되려는 열심에서부터 나온다.


자신의 의가 인정받지 못할 때는 파당을 짓고 분열에 앞장선다.


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함으로서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려고하지만, 정작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없다.



(나가는 말)


교인들과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하면, 대부분이 회피를 한다.


오히려 세상 이야기를 하면 즐겨듣는다.


설교에 의해서만 수동적으로 신앙이 자란 성도는, 엔진이 없는 끌려다니는 객차와 같다.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 않는다면, 결코 어떠한 대책도 세워질 수 없으며, 어떠한 희망도 바라볼 수가 없다.


평생 들어온 설교로만 성숙된 장로는 교인들을 대표할 능력이 없다.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의 설교는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없으며,  이러한 설교는 아무리들어도 희망이 없기에, 교인들 스스로가 변해야한다.


죄인식이 결여된 설교만 평생 들어온 교인은, 공급이 없으면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하는 영원한 프렌차이즈와 같다.


평생 프렌차이즈 사업만하여온 사람은 영원한 무능력자로만 남든 것이다.


진정 깨어있는 성도는 스스로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교리에 대하여도 스스로 책을 구입하고 공부하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여야하며, 스스로 말씀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나아가야하며,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한다.


목회자가 죄에 대한 언급을 하지않더라도 교리 공부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존재론적인 죄인인지에 대한 인식을 키워나아가야한다.


존재론적인 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한다.


다윗이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눈물로 기도를 하였듯이, 교회와 나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구해야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죄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국 교회는 2007년에 다시 부흥을 시도하여했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하나의 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Again1907은 부흥만을 욕심낸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이벤트에 불과한 행사였다.


죄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기에, 이제는 성도들이 변해야한다.


모든 변화와 개혁은 교리의 가장 기초가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죄인식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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