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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11.25 :: 수동적 신앙생활과 교회의 부패
교회 2018. 12. 13. 14:48

교회의 부패와 인간의 죄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교회의 부패에 대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어왔던 문제이다.


최초로 교회를 만드신 예수님도 부패된 교회의 희생자이셨다.


최초로 부패한 교인은 가룟 유다였다.


교회의 부패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그 양상이 정도를 넘어서 보편성을 가진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은, 부패의 속도와 부패의 보편성과 교인 수의 급격한 감소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의 감소와 첨단문명의 발달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들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근원적인 문제가 교회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수 많은 개혁과 자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으로의 상황도 역시 점점 더 안좋아질 수 있고,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부패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고, 개혁을 외치기도하지만,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 부패의 현장이 바로 자신이 속해있는 현장이고, 바로 자신이 믿었던 이들 가운데 일어나고있으며, 심지어는 교회 개혁을 외쳤던 자기 자신이 부패의 현장 한 가운데 있기도한다는 사실이다.


이해하기 힘든 문제는, 꾸준하게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당사자가 바로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결과는 개혁의 주체들의 다툼과 분열이라는 결과를 보는 현실에 있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무리들 자신들이 다툼과 분열의 현장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교회 부패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는 왜 끊임없이 문제의 한 가운데 있어야하고,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사자마져도 문제의 주역의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교회의 부패에 대한 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은, 분명 그동안의 처방들이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수 많은 싸움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인식하거나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과 인간 스스로의 승리를 외치는 사건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패배하는 것으로서, 타락한 인간의 자존심은 자신의 패배를 용납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남에게 돌림으로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는 죄성을 가지고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용납이 안되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자기 완성을 위한 인간의 죄성은 교회에 모인 교인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상적인 접근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여야한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현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인간의 존재론적 죄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외면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선함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결과일 뿐이지,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인 이유는,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몸소 교회를 세우셨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기에 모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도는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체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속성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성도가 용서받은 것은 행위로서의 죄악 이전에 존대론적으로 죄인인 것레 대한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범죄를 하지 않아도 존재론적으로 죄인이기에 세례를 받아야하는 이유와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행위 이전에 존재론적인 현실이다.


성도는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은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심판에서 현재적으로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다.


육신이 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고,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거듭나 새사람이 된 성도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소욕을 다스려야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악된 육신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의 새 몸을 입을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성도라 할지라도 다스려야할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된 죄인은, 죄성을 가진 육신을 다스리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


하지만 죄성은 가진 육신은 어느 정도의 환경만 조성이 된다면,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고간다.


성도가 되었다고 환경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수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며 존경받아왔던 목회자도 어느날 한순간에 성추행 문제로 순식간에 몰락하기도한다.


세습의 문제에 휘말린 대형교회 목사들의 타락도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법이 사회법 위에 있다는 말로서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바벨탑과 같은 건물을 지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짓된 포장을 하는 교회의 대형화는 인간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이들은, 겸손의 자리로 옮겨갈 적절한 시기를 놓침으로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락하는 것이다.


타락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였던 것이다.


부패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환경을 만든 이들 모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질하는 이도 그 자리에 서면 예외없이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은 다르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다.


손가락질하거나 고발하는 것으로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


이미 부패할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은 인간 모두가 직면하는 상황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에서 할 일은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상황의 개선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인간이 투쟁하면서 나아지게하는 상황은 고무줄을 당기는 것 뿐이다.


고무줄은 상황만 주어지면 원위치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 대한 소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성도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육신의  소욕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윗의 눈물의 기도는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고통스러워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교회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이,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한다.


교회는 성도에게 삶의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공급처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서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곳이어야한다.


공예배에서의 설교 주제는 죄에 관한 것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복을 받는 복음이 아니라,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여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 만큼이나, 교회의 설교단에서는 죄에 관한 언급을 들어볼 수가 없다.


오히려 도덕적 선함을 드러내는 곳이 인기를 끌고있다.


유대인들의 도덕적 선함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다.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걱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십년간의 공예배에서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선포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교인들을 떠나가게만들고, 교회는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대부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무덤에 들어가야한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 어느 누구나 다를 바가 없이 똑같다.


인간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어느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다.


육신에 대한 죄성을 인식할 때, 자신의 육신이 시험에 들지 않게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근신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했지만, 부패한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자연법 앞에 서있는 모든 인간은 다른 이들의 죄를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하지만, 모든 인간은 파멸의 길을 가면서 자연법 앞에서 죄인임이 증명될 뿐이다.


인간은 첨단 문명을 통해서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려고하지만,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죄성은 단순한 불순종의 죄성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든 진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완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한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교인은,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교회 생활을 하며,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교회에서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는,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유사한 모습을 나타내기도한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리세린에게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오셨지만, 자신들이 죄인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열심이었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교회에서 열심인 교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의인이 되려는 열심에서부터 나온다.


자신의 의가 인정받지 못할 때는 파당을 짓고 분열에 앞장선다.


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함으로서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려고하지만, 정작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없다.



(나가는 말)


교인들과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하면, 대부분이 회피를 한다.


오히려 세상 이야기를 하면 즐겨듣는다.


설교에 의해서만 수동적으로 신앙이 자란 성도는, 엔진이 없는 끌려다니는 객차와 같다.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 않는다면, 결코 어떠한 대책도 세워질 수 없으며, 어떠한 희망도 바라볼 수가 없다.


평생 들어온 설교로만 성숙된 장로는 교인들을 대표할 능력이 없다.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의 설교는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없으며,  이러한 설교는 아무리들어도 희망이 없기에, 교인들 스스로가 변해야한다.


죄인식이 결여된 설교만 평생 들어온 교인은, 공급이 없으면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하는 영원한 프렌차이즈와 같다.


평생 프렌차이즈 사업만하여온 사람은 영원한 무능력자로만 남든 것이다.


진정 깨어있는 성도는 스스로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교리에 대하여도 스스로 책을 구입하고 공부하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여야하며, 스스로 말씀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나아가야하며,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한다.


목회자가 죄에 대한 언급을 하지않더라도 교리 공부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존재론적인 죄인인지에 대한 인식을 키워나아가야한다.


존재론적인 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한다.


다윗이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눈물로 기도를 하였듯이, 교회와 나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구해야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죄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국 교회는 2007년에 다시 부흥을 시도하여했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하나의 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Again1907은 부흥만을 욕심낸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이벤트에 불과한 행사였다.


죄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기에, 이제는 성도들이 변해야한다.


모든 변화와 개혁은 교리의 가장 기초가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죄인식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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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신앙생활과 교회의 부패  (0) 2018.11.25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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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018. 11. 25. 19:35

수동적 신앙생활과 교회의 부패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도는 종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아담은 불순종, 즉 반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있기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아들의 위치에 앉히기를 원하셨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들로 다시 부르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어도,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들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성도에게 요구되는 생활은,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는 수동적인 생활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아들로서의 자유를 누릴 줄 아는 능동적 생활이다.


능동적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견고히 서야만 한다.


진리 안에서 올바른 교리로 정립된 신앙을 갖지 않고는 잘못된 사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가 없다.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미 선조들이 정립해 놓은 옳바른 교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앙 생활은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말씀 안에 세워지도록 노력하여야만 한다.


타인에게만 의지하는 수동적 신앙생활은 자칫 잘못된 교리를 분별해내지 못할 수가 있다.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보편적 죄악을 양산할 수 있다.


잘못된 사상에 길들여진 무리들은 자기들만의 독선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집단의 수장은 성경의 권위 위에 올라서며, 자신의 말에 성경을 넘어서는 최종적 권위를 부여한다.


잘못된 이단 사상이 수용되는 모임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잘못된 신학적 사상을 전하는 목회자의 설교가 수동적으로 수용돠는 교회는 자칫 집단이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많은 목회자의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사상이 담긴 설교가 여과없이 수용되고 용납되고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서 한국 교회의 부패가 가속화되었다.


사단의 거짓을 수용한 아담에게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듯이, 한국 교회의 부패에는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분별없이 수용하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분명히 있다.


여기에는 성도가 목회자의 설교를 비판하거나 목회자의 뜻을 거역하면 벌을 받는다는 우매한 기복신앙이 자리잡고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파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그대로 수용하는 이들은 비록 목회자에게는 잘보일지 모르겠지만, 유혹은 받은 아담이 뱀과 하나가 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들에 대하여 목회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이 책임을 지려고하지 않는 태도는, 극단적으로 뱀의 꼬임을 받아들이고서 선악과를 범한 후에, 잘못된 결과에 대하여 뱀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올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마음에서 원했던 여지가 있었기에, 그 틈을 노리고 사단이 침투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사단의 유혹을 받으며, 무너지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왜곡시켰듯이, 교회 안에서 말씀의 왜곡은 끊임없이 일어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도의 침묵은 목회자의 유혹에 대한 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무너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왜곡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와는 말씀을 왜곡시키는 뱀에 대하여, 왜 말씀을 왜곡시키냐는 항의조차하지 않았는데, 이는 하와 자신도 선악과에 대한 탐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단의 왜곡된 말이 먹혀들어간 것도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신앙의 수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무너짐은 목회자의 왜곡된 선포뿐만이 아니라, 교인들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신앙의 수동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말씀을 왜곡시키는 목회자 못지 않게,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교인들의 수동적 신앙생활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가꾸어나가길 원하는 성도는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말씀으로 무장되어있어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는다하더라도 그 설교가 자신의 것이 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잘못된 설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설교로는 자신에 맞는 옷을 지어 입을 수가 없다.


자신에 맞는 옷을 입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리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스스로 자신에 맞는 옷을 지어입는 행위는 일종의 능동적 신앙생활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개인의 신앙생활을 그 특성상 나누어 볼 때, 수동적 신앙 생활과 능동적 신앙생활로 구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능동성이 결여된 수동적 신앙 생활은 일종의 의존적인 방식으로서, 잘못된 교육에 대하여는 무방비적으로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밖에 없다.


마치 양육되어지는 어린 아이나, 교육을 받는 학생과 같이, 순종이라는 수동성이 요구되어지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교역자들의 요구에 의한 수동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와같은 범주에 속하여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양육 되어져서 어른이 되고,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의존적인 성도는 언제 신앙의 영역에서의 어른이 되고, 신앙의 영역에서의 사회인되어야할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한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성도가 끊임없이 양육되어지기를 원하지만, 독립적인 사고를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성도가 신앙의 영역에서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능동적 신앙생활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수동적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교회 의존적인 성도는 제도권의 교회를 벗어난 영역에서 좀처럼 능동적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에서는 성도에게 자율적인 능동성을 요구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다.


수동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의 능동성은 자칫 부차적인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고, 능동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의 수동성은 교회가 변질되고 부패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유형에서 지나치게 수동적인 양상을 보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교회 생활의 기준을 성경보다는 목회자에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종교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는 제도적 교회의 관습을 성경에 비추어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행동 방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되기에, 교회에서의 모든 행동 방식은 성경에 비추어 점검되어야한다.


성경을 개혁의 기준으로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능동적 방식과 수동적 방식보다는 적극적 방식과 소극적 방식으로 구분되어야한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제도적 교회의 방식에서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은 개혁을 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개혁을 감행하였다.


루터가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  소극적 개혁이었다면, 칼빈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개혁을 감행한 것은 적극적인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도가 자신의 교회생활에 대하여 점검해 볼 때, 루터의 소극적 방식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칼빈의 적극적 방식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모두 다 능동적 행동 방식이라는 범주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자가 아닌 성도가 제도적 교회에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적 교회에서의 자신의 교회 생활 방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하는 능동적 방식과 수동적 방식은,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주체가 자신인지 아니면 교회 의존적인지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 신앙 생활의 주체가 되려는 능동적 신앙 생활 방식에 대한 두려움은,  자칫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막고 목회자 의존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이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닌 수동적인 방식이다.


종종 자신의 수동적인 방식을 소극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독립적이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위안하기도한다.


수동적 방식이 독립하지 못한 의존적 방식인데 반하여 소극적 방식은 독립하지 못한 수동적 방식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능동적 행동 방식의 범주에 속한다.


적극적 행동 방식이든, 소극적 행동 방식이든,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있다고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있는 신학적 유형이 어디에 속하여있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독립적인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신앙인은 모두 신학자라는 말이 있듯이, 어떠한 신앙인도 나름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세계가 있다.


하지만 일반 성도가 신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은 마치 목회자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신학적 유형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성도가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목회자의 신학적 틀에 맡겨놓고서, 목회자 의존적인 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같은 교단의 목회자들이라도 그 신학적 특성은 다 같지가 않으며, 신본주의적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신본주의나 인본주의를 떠나서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 도취적인 교주의 모습을 띤 사업가로서의 목회자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남용하기도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교회를 허무는 이들이라고 비난하기도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성도들 간에 신학적 토론에 대하여 배타적이며, 성도가 성경을 논하는 것에 대하여 극도로 경계하기도한다.


목회자 독선적인 교회 분위기에서 성도들은 신학적 사고에 대한 결핍을 가져올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얼토당토않은 신천지와 같은 잘못된 이들의 궤변적 논리에 대한 분별력마져 갖지 못하는 경우도있다.


한국 교회에 신천지들이 숨어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이러한 수동적 취약점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성도들이 개혁주의 교리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지식만 가지고있었어도 신천지와 같은 거짓은 전혀 먹혀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능동적 신앙은 수평적인 토론 문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표현하는 것에 무척이나 힘들어 한다.


신학책들은 목회자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신학책들은 조금만이라고 자신의 신앙적 유형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자하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어렵기만한 책은 아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 간에 수평적 관계를 갖고자하는 이들은 최소한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있어야만 한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은 결코 목회자와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한국 교회의 내부적인 가장 큰 문제는 목회자 의존적인 성도의 수동성과 성도를 자신에게 길들이려는 목회자의 잘못된 리더쉽에 있다.


능동적인 신학적 정립이 없이, 목회자에게 의존하며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여 장로가 된 이들은, 목회자 의존적인 당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으며, 장로 교회의 장점들을 살려낼 수가 없다.


내세울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당회가, 목회자와 불협화음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성도의 신학적 관점의 부재와 수평적 관계의 부재로부터 오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세속 사회에서의 수직적 권위를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여서는 안된다.


교회에서의 직분자는 섬김과 사랑이 없이 자신의 직분을 주장해서도 안된다.


능동적 신앙으로 신학적으로 정립된 직분자는 섬김과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수동적 신앙에 익숙하여 신학적 부재를 보이는 직분자는 섬김과 사랑은 자신을 추락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하기에, 결국 스스로를 높임으로서 권위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직적 관계는 세속 사회만의 특징이다.


교회에서 직분자와 성도 사이에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면, 교회는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어야한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의 교리 교육의 중요성 못지 않게, 성도 스스로 교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적합한 교리 공부를 해야만 한다.


신학이라는 개념은 막연하지만, 교리는 신학을 구성하는 내용물이다.


성도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교리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교회 안에서 수평적인 토론 문화가 시작될 수가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거부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수동적 신앙생활은 목회자를 권위적인 존재로 만들었으며, 이는 한국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되어왔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전통적 교회는 마치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녹아내리는 빙하의 모습과 같다.


주입식 교육 방식은, 각자 개인이 진리의 기준이 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더 이상 적용될 수가 없다.


신학적 논리의 토대가 되는 교리 교육은, 주입식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토론 방식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교리를 중심으로한 토론 문화는 성도의 체질을 든든하게하여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


또한 목회자의 독선적이고 무지한 자기 주장에 대한 분별력을 키움으로서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어나간다.



자유 의지와 능동적 신앙생활


타락 이전의 아담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과 책임을 지는 행동이 요구되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자유 의지를 가진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지닌 존재였지만, 타락 이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지 않는 육신(natural body)이 되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었지만, 여전히 육신(natural body)안에 있기에, 육신이 변화를 입는 완전한 성화를 기다리는 존재이다.


성도는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지만, 여전히 육신 안에 있기에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성화가 요구되는 죄인으로서 존재한다.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는 시작은 되었지만, 몸이 다시 부활하여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을 때까지는, 점직적 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어야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회복하며, 다시 자유 의지를 갖게되는 성도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책임있는 행동 방식이 요구된다.


영적인 분별력과 책임있는 행동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던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하였던 자였다.


하나님의 인격은 존중받는 자유 의지라는 속성을 내포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아담의 자의적 의사 결정을 존중하실 수 밖에 없으시다.


아담의 의사 결정을 존중하지 않고 간섭하신다면 아담에게는 진정한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이며, 아담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로 자의적으로 결정을 하였을 때, 아담의 인격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은 이를 막으시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을 간섭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하였으면, 비록 타락은 없었을지 몰라도, 자유 의지가 존중받지 못하였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이라는 언약의 말씀에 비추어 뱀의 꼬임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뱀의 말을 들음으로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에 들어간 성도는, 자유 의지도 마찬가지로 회복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였지만, 둘째 아담 안에서 구속 받은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셔서 소유가 그리스도께 있기에, 하나님을 거부할 자유 의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성도 안에 회복하는 자유 의지는 오직 말씀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 되어 적용될 때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성도는 올바른 말씀 위에서 잘못된 유혹을 분별하고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한다.


교회의 성도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에 비추어보아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말씀이 올바른지 분별할 수 있어야하고, 이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하여야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도에게는 수동적인 행동 방식보다는 능동적  행동 방식이 요구된다.


만민교회 사건이나 안상홍 집단, 혹은 신천지 집단들의 경우는 성도의  능동적 행동 방식이 결핍된데서 나타난 결과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보편적 교회의 성도들이 익숙해진 수동적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이와같은 집단적 속성을 가지고있다는 것이다.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신약의 성도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야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된 성도는 더 이상 처음 아담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한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선악과 금령을 기준으로 행동했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새언약인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하며 행동하여야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적용하여 사단의 유혹을 분별하였다면, 선악과 범죄는 없었을 것이다.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자에 대한 복종도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


목회자의 설교가 성경이라는 범주를 벋어나거나 말씀을 왜곡시켜 선포할 때는, 이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한다.


모든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로서, 그리고 제사장이며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소유하고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소유한 성도는 의존적인 수동적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능동적 신앙을 소유해야만 한다.


교회의 목회자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통로도 아니며, 단지 교회라는 조직의 직분자이기에, 의존적 대상의 단계를 넘어서야한다.


성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섭리 가운데 성도는 스스로가 하나님 안에서 분별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하는 주체가 되어야한다.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근거로하기에, 결코 인본주의적 개념이 아니다.


성도가 신앙의 능동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말씀 안에서 얻은 자유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어린 아이와 같이 수동적으로만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성숙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능동적으로 나아가야한다.


성도 안에서 시작된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인격은, 성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성도 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은 존중되어져야만 하며, 마땅히 존중 받아야만 한다.


존중받는 인격체로서의 성도의 능동적 행함은, 자유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의 표현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상실된 자유 의지는 둘째 아담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거치게되며, 이는 점진적 성화를 거쳐, 영적인 몸을 입을 때 완성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성화는, 회복된  인격체로 열매맺어져야한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마치 재활치료를 받는 환자와 같이, 보조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걷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재활치료의 과정은 보조 기구에 의존하던 수동적 행동에서 벗어나, 보조 기구에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능동적 행동 방식으로의 전환 과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니님의 인격적 형상은, 성도 스스로 독립적인 능동적 행동 방식이 마땅히 요구된다.


평생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행동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은 영원한 불구자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의 회복을 경험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순종은, 회복된 자유 의지를 근거로한 능동적 순종에서 우려나와야한다.


성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신 능동적 순종에 추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성도의 능동적 순종은 울법의 제3의 용도로서, 구원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의 순종은 공로가 될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신앙의 능동성은 율법의 구문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안에서, 인격적 회복의 과정 가운데 맺혀지는 열매이다.


신앙생활이 말씀보다는 목회자 의존적이 될 때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위치는 모호해진다.


목회자는 의존의 대상도 아니고 섬김의 대상도 아니며, 단지 성도를 인도하는 교회 사역의 직분자일 뿐이다.


교회 생활 가운데 성도의 성화를 위한 능동적 행동 방식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의 마땅한 생활 방식이며, 그 가운데 교회는 건강해질 것이다.


건강한 교회 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되어야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서 힘써 율법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건강한 능동적 생활 방식을 위해서는 건전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한다.


교리와 신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리는 신학이라는 틀을 구성하고있는 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성도나 신학적 틀을 가지고있지만, 정작 자신은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의 능동적 생활 방식은 교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출발되며, 교리에 대한 스스로의 능동적 탐구를 통하여 교회는 더욱 건강해져 갈 것이다.


한국 교회의 다양한 고질적인 문제는 현상적 문제 이전에 교리에 대한 인식 부족과 수동적 신앙 생활이라는 원인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사회의 근심이 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능동적 관심에서 출발된 개혁주의 신학이 교회에 뿌리를 내림으로서 교회의 체질이 변화될 때 건강한 교회의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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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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