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상황 2020. 1. 21. 17:11

하나님의 저주에 담겨있는 축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저주로 보이는 현재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기 위해 준비되어지는 과정이다.

 

이번 글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비롯된 인생의 역경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한다.

 

인생의 현재적 삶은 과거와 동떨어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곳인데 인생의 삶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현재적 삶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담의 범죄와 에덴 바깥으로의 쫓겨남,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바벨론으로의 쫓겨남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면, 에덴의 바깥에서의 현재를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들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 바벨론에서의 삶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에덴의 바깥과 바벨론, 그리고 아담과 이스라엘의 유사성을 통해서, 에덴의 바깥 세상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벨론에서와 같은 삭막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경들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에덴의 바깥에서 살아가고있다.

 

인간은 개인이 죄를 저질러서 죄인이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처지와 매한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인간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신 것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면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 아래에 있다.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현재적 상황은 범죄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은 에덴의 풍요를 누리는 축복을 받도록 지어진 존재였다.

 

에덴의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되었다.

 

모든 인생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에덴의 동쪽 길까지 차단 당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야했다.

 

타락한 아담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땀을 흘린만큼 먹는 즐거움도 있으며, 인생의 수고의 결실로 인하여 풍요를 누리는 낙도 있다.

 

땅을 갈며 수고하여야만 결실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일까?

 

결코 아니다.

 

이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였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을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상황은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쫓겨난 상황으로 재연된 것이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잡혀갔었기에, 바벨론에서의 삶은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들도 마찬가지로 사탄의 종노릇하며 전적으로 부패된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만약에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바벨론에서의 성공과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을 잊은 백성으로서 영원한 멸망이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현재의 삶에서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을 것이다.



풍요의 에덴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바벨론은 가나안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에덴의 바깥이 에덴 동산과 대조를 이루었던 것과 유형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있는 것과 같다.

 

에덴의 바깥은 아담을 유혹하였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가나안에서의 예루살렘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었지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집합체를 이룬 곳이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약속되었지만, 에덴 바깥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땅을 갈아야만 하는 곳이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는 곳이다.

 

바벨론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수고의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었지만 바벨론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 간신히 먹고 살 수있는 곳이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던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에덴 바깥에서 땅을 갈아야하는 삶을 재연한 것이었다.

 

바벨론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 세계의 환경을 대변해주고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곳곳에 성전이 세워졌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바벨론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유수는 절망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바벨론에서의 삶은 바벨론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에 대한 징계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삶이 되어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또한 바벨론에서의 삶은 자신들의 죄성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시간이되어야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땅을 갈며 가나안에서의 풍요를 그리워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시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만 했다.

 

다시 가나안에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했다.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다짐을 다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상처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되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미 기력이 쇠한 그들은 구원자의 도움을 간절히 갈망하고있었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투쟁도 해보았지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들과 불칼로 가로막혀있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유다 마카비우스의 혁명은 지금까지도    하누카로 기념되고 있지만 이러한 무력으로는 성전을 회복시킬 수도없으며, 인간의 노력에 의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여야만 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

 

인간이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상당부분에서 바벨론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바벨론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여야했던 세계였듯이, 에덴 바깥은 불순종한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경험하고있는 세상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인간들이 존재론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해주는 곳이었다.

 

에덴 바깥의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경험하게해주는 곳이다. 

 

문제의 핵심은 세상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성에 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풍요에 의해서는 죄를 깨닫을 수가 없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어려움과 고생 가운데서만 자신의 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에덴서 쫓겨난 아담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만 했듯이, 모든 인간의 수고는 불순종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강령이다.

 

비록 문명의 발전에 의해서 상공업이 발달되었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을 갈며 수고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지만 인간은 이를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불순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의 길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명의 발전과 도시 문화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독립하고자하는 정신이 근원에 자리잡고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고자한다.

 

인간은 살기위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최선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최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망이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발전되어질 수도있다.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보다는 하나님없이 살아가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있다.

 

끊임없이 도망가고자하는 인간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를 구원하시고자 요나와 같은 어려움을 주시기도한다.



절망적인 환경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있다.

 

인간이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되는 절망들은 대부분 육신적인 절망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으시기에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과 같을 수가 없다.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삶은 이익이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자아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이익의 실현은 자신의 명예욕과 성공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키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어떠한 인생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을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죄인이다.

 

인간의 자아실현은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킨다.

 

특히 성공한 인생에서 자신의 죄성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내면에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한번쯤은 어느 순간에 심각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깊은 좌절감에 빠져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붙들기가 쉽지가 않다.

 

인생이 절망에 처해있는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종종 인간 관계가 최악의 상황이 되기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있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오신 분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주님을 외면한 세상의 화평은 독이될 수 있다.

 

주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시기도한다.

 

사람들은 평화를 외치지만 하나님을 외면하는 평화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와의 전쟁, 자연 재해, 사회의 죄악, 인간의 질병등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결코 해결될 수 없지만 이러한 불행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있다.

 

표면적인 평화와 안정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에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삶이 평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제동이 걸릴 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고통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살아가야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의무는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깨져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면서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살아간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지만 인간은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로 드러날 때까지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가 드러날 때까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 해결책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표면적인 해결은 근원적 문제를 외면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지속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고 살아간다면 이러한 상황 자체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 삶의 풍요로 인하여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밖으로 쫓아낸 아담에게 그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심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이는 인간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고생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일그러졌지만 그나마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형상이 남겨져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되어있으며, 영원한 것을 갈구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자한다면 인생의 절망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여야한다.

 

인간은 준비되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인간은 절망의 상황에 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로하여금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끔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면서 다가오신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땅을 가는 수고와 고통이 주어졌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함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

 

아담의 범죄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아담의 땅을 가는 수고는 바벨론에서 재연되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시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을 통하여 자신들이 근원적인 죄인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은 자신의 현재적 삶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교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생은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택함받은 이들은 자신의 교만함이 무너지는 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역경과 어려움, 극단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 우울증, 좌절감, 절망, 고통, 외로움….등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들이 예고도 없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덮치기도한다.

 

고통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고통의 시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의 시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한다.

 

심지어는 고통 자체가 너무 힘들어 목숨을 끊는 이들이 부럽기까지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시간에 가장 가깝게 다가오신다.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말씀 가운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누구를 원망하기 이전이 자신이 그렇게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불행의 근원에는 자신의 교만이었으며, 이제껏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못 알고있었는지를 알게된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은 죽음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임을 새롭기 깨닫게 된다.

 

자신의 고통의 시간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시간이며 자신이 죽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결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에덴 바깥에서의 삶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태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태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바벨론에서의 삶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기다리는 삶이다.

 

바벨론은 변화되지 않고 멸망당했다.

 

이 세상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합된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기에, 성도는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때가 차면 성도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삶의 고통은 영원한 것을 위한 마중물과 같이 성도에게 필요한 과정이기에,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역경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부정적 상황 2020. 1. 16. 12:35

진리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



들어가는 말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이 어떠한 죄악을 범하고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를 소유했다고해서 모두 다 자유케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사람은 살리기도하지만 죽이기도한다.

 

참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적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이 생명 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면서 아담 부부를 에덴에서 쫓아내신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는 주체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 부부는 자신들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스스로가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게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판단의 주체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왕권으로 다스리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관리하는 제사장직을 맡았음을 알려주고있다.

 

에초에 인간은 창조시부터 모든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로 창조되지 않았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가운데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으며, 모든 일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처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었던 모습과 대조를 보여 주신다.

 

진리를 소유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고하는 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려고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는 사람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이며, 둘째는 그 나무의 열매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 열매에 약효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선악을 알게된 것은 불순종에 따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 부부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되었다는 것은 스스로가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움직이겠다는 불순종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참조 사항일 뿐이지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교회 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가고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육신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며, 말씀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된 방식으로 적용시키기도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이러한 기복 신앙에 축복을 남발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도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기에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교회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을 한다.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 안에 나타나는 죄의 결과물로서,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끊임없는 먹는 죄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범죄한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났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만약을 가정을 하여 아담 부부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이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이는 영원한 지옥의 삶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고 기록하고있다.

 

아담은 에덴 성전에서 성령에 참여한바되었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피조 세계를 왕으로서 다스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으면서 에덴에서의 풍요를 맛보았지만, 처음 아담이 범한 죄로 죄인이 된 이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으로서의 교회에서 다시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성직자나 교인들의 타락, 다시 말하면 교회의 영역에서 자신들이 선악간에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결정권 자가 된다면,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가 없으시기에 이들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소유한 성도들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주체가 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 선악과를 먹는 행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정치 참여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 개인은 사회의 일원이면서 또한 교회의 일원이다.

 

성도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가 교회의 일원이라고 할지라도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서 마땅한 것이다.

 

성도의 정치 참여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참여하여야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서 정치 참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기에,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규정하는 자연법을 근거로 하여야한다.

 

자연법은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유지하는 규범으로서 교회의 성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규범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자연법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법, 즉 성경 말씀을 근거로 존재하고 움직여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택하신 자의 구원에 있다.

 

구원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행된다.

 

이 세상에 대한 보존은 아브라함 언약보다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한다.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최후의 심판 때까지 더 이상 노아의 홍수와 같은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노아 언약은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언약도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기관이다.

 

세상의 제도와 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세워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운행되는 교회와 자연법을 근거로 운행되는 사회 기관은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다른 목적으로 운행되고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지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에만 속하여있다.

 

성도와 달리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으로만 운행되어야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면 이는 자연법을 근거로하는 사회 기관에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을 강요하는 행위가 된다.

 

신앙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느 편에 서든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성전인 에덴에서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 되려했던 아담의 선악과 범죄와 같은 맥락에 서게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칼빈을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인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 행위를 하였던 것은 당시 유럽의 여러나라가 종교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룬 신정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정치는 목적과 운영체제가 다르기에 결코 어떠한 결론적 형태를 이루어낼 수 없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에덴에서 쫓겨났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을 넘어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결정권자 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에덴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곳이었다.

 

에덴은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도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에덴을 재연하고있듯이, 이 세상은 바벨론을 재연하고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나 공통점은 자신들이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최종적 결정권자인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범죄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잘못된 사회 체제를 직면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문화는 대부분 사악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라고 하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수동적이었지만 에스더의 정치 참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 멸절시키고자한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즉 자연법을 근거로한 백성으로서의 참여였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궁극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지만 이 세상 문화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했지만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만 적용한 것이며 결코 바벨론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상식적 논리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 적용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손에 잡혀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납득이 안되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시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이는 주권이 침해당하고 농락 당하는 일이기에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일이며,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 해방 전쟁을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더군다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고 어린 아이까지 다 죽이는 것은 인륜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자연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는 진리의 주체이시다.

 

진리는 인간이 절대화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 절대화시킨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법을 절대화시키고자한다면, 이는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와 한 가지이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사회법은 단지 인간 문화에서의 법일뿐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적용될 때에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될 때에는, 그 인간의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데서만 진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자 선악과를 범했지만 그는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었다.

 

참진리는 인간을 자유케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될 때에는, 이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자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될 때 인간은 사탄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허용 범위 안에서 적용될 때에만 인간은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었듯이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순종이 요구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영역을 침범한 아담은 더 이상 에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기에 에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은 또 다시 아담의 죄를 범하는 것이된다.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는 없다.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교회를 허무는 이들이며, 이들의 행위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
부정적 상황 2019. 1. 19. 17:07

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단순한 느낌을 넘어서 허무감에 압도되어 침물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자신의 과도한 의욕과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좌절감에서 오는 허무감도 있겠지만, 적당한 의욕, 혹은 최소한의 권리마져도 빼앗긴 상태에서 엄습해오는 허무감은 감당하는 것 조차도 힘든 경우도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능력의 한계가 있기에, 자신이 감당할 능력을 넘어서는 짓누름은 인생을 깊은 좌절감으로 몰아가기도한다.


엄습해오는 허무감과 좌절은 우울증으로 이어지며, 의욕이 상실됨 삶은 끌고 가는 것 조차도 힘들어진다.


뜨거운 물에 눈이 녹듯이, 고통이라는 뜨거운 물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좌절의 심연을 빠뜨린다.


이전에 열심을 내었던 것들은 허무해지며, 과거의 추억들은 과거일뿐, 현재의 자신과는 관계없는 순간들로 기억된다.


친근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멀어져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리기도하고,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면서, 버려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버림받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무관심과 배반, 열심을 내었던 직장에서의 상실감등은 허무를 넘어 분노와 증오로 이어지기도한다.


분노와 증오는 자신을 움직이는 또 다른 삶의 동력이 되기도하지만, 왜곡된 동력은 또 다른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며 인생을 더욱 허무 속으로 몰아가기도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반전이 될 수 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지렛데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이 변화될 때 좌절과 고통이 또 다른 희망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광주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불행을 경험하면서, 마음 속 가득히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지만, 생각이 변하는 순간,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여지기 시작했으며,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더불어, 상실되었던 삶의 의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도하였다.


비록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삶은 허무와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인생은 분명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순간들


어느 순간부터 예전에 열심을 내었던 일들이나, 자주 만나 삶을 공유했던 이들이 잊혀지면서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허무감을 밀려오기도한다.


어린 추억이 담겨있던 집을 방문해보면, 옛 추억의 현장들은 변해있고, 옛 추억의 동창들을 만나보면,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변해있었다.


이와 더불어 예전의 삶을 기반으로 서있던 자신의 모습은 초라해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아마 똑같은 삶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추억의 순간들은 사라졌지만, 추억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있고 미래의 삶이 존재한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순간 순간 사라지는 것들은 허무 할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예표한다.


순간의 것들은 영원한 것을 구성하고, 예표하는 유형적 표상이다.



허무함으로 다가오는 육신의 연약함


인생의 허무함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다가 온다.


육신이 강건할 때 영원한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않고,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얻기 원한다.


육신의 연약함은 현재적 삶에 대한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기력이 쇠하기에 의욕은 상실되고, 예전과 같지 않은 몸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바라보며, 세상에서의 의욕보다는 활발했던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를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만나는 이들보다는 이별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며, 자신마져도 옛 추억들을 가슴에 간직하고서 이 땅과의 이별을 준비하게된다.


인생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이 땅과 이별해야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허무한 삶을 이루어 나가지만, 궁극적으로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생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감될 때 더 이상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죽음 후의 삶이 허락된다하더라도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 이루어내었던 것이 천국에서의 삶에 영원히 보존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없다.



의지할 대상이 아닌 인생들


삶 가운데 만나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귀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은 무력해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타락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육신이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땅에서 의지할 대상들을 만들어간다.


의지할 대상은 어느덧 자신의 우상이 되어버린다.


교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없다.


교회가 의지할 대상이 될 때 교회의 목사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며, 우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교회가 섬김의 대상이 될 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신앙 생활이 자칫 우상을 숭배하는 생활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우상이 되어버린 목사는 탈선할 수밖에 없으며, 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은 허무함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교회를 의지할 때, 삶의 활력이 되어야할 교회 생활이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버리기도한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이 세상의 것들을 쫓아가는 육신이 되었다.



허무함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시면서 또 거두어 가시는가?


세상적 관점에서본다면, 인생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허무한 삶일 뿐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을 살아갈 힘이 주어진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불행이 없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배제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만 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한 존재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에게는 스스로 삶의 활력을 느끼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활력과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육신을 위한 삶은 자기 만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육체를 위한 삶이 동력이된 인간에게 더 이상 자기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인간에게 있어서, 동력은 오직 육신의 소욕을 위한 것이다.


욱신의 소욕으로 축적된 재물로는 결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


성공한 인생이든, 실패한 인생이든 허무로 귀결되는 것은 한 가지이다.


하지만 성공한 인생은 자기 만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실패한 인생은 그 고통이 하나님을 찾는 동력이 되어, 생명에 이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실한 마음과 삶의 고통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도록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허무함과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환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외부의 강압적인 환경이 없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수가 없다.


아담이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다함은, 그 육신의 소욕에 종속되어, 하나님 대신에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인간의 육신의 삶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가나안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풍요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은 애굽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잊어 버렸을 것이다.


애굽에서의 풍요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인생을 영원한 음부로 이끌뿐이다.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와 고통은 인생에 생명이 없음을 인식하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몸에 문제가 있어도 고통이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치료의 기회를 놓쳐버릴수밖에 없다.


의사는 아무 불편을 호소하지 않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지 않는 인생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으신다.


고통과 허무함으로 인한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영원한 것만이 고통과 허무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쁨은 허무함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자의 밥이 되며 죽어가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전의 삶에 대한 허무함보다는 앞으로 경험하게될 새로운 인생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서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허락되었기에,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영원한 삶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된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 자체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외롭고 힘들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행동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같이, 이 세상의 고통이 나를 집어 삼키려할지라도, 오직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인간이 옆에 있는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척이나 힘들 때일수록 기도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준다,


힘든 인생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기에, 성도는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 타락한 아담이 원망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무력하셔서 아담의 범죄를 막지 못하셨는가?


아니면 마치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의 함정 단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목격하시고도 징계를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방치하셨는가?


이 두 가지 다 결코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의 인격체이다.


아담의 인격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다.


아담의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참된 인격체는 자신이 결정한 행동 방식이 존중받을 때 참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선택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세우심으로서, 창세 전 미리 택정한 자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인생은 택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의 고통을 통하여 출애굽으로 이어졌듯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삶 가운데서의 고통을 통하여, 택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것들을 위한 순간들


순간의 시간들이 없다면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가 없다.


비록 창조 세계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많은 부분 파괴되고 변질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결코 허무하게 무너진 세계가 아니다.


순간이 영원이 되고 허무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바뀌고 고통이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다.


땅에서의 것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이 인생의 구원과 천국을 예비하는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이 될 수 있다.


인생의 과정들은 땅에서의 순간들이 영원으로 열매맺는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죽어있는 삶에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이며, 인생은 죽어가는 것 같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명력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인간은 허무함과 고통으로 뒤덮이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을 수가 없다.


삶은 살아있는 인생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적으로 죽어있는 인생들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복음을 받기 전에는  실상은 죽은 자였었다고 말한다.


인생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다.


인생은 생명을 제공받을 수 있는 그루터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생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 땅에서의 인생이 없었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인생을 알게되고 영생을 알게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지를 알게된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풍성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한다.


다양한 과실들과 자연의 오묘함과 광대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은 영원한 것의 유형적 표상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을 예표하고 경험하는 삶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다양성에는 영원한 실상의 유형적 모형들이 담겨있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통해서 처음 창조시의 영적인 몸을 그려볼 수가 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예표하였으며, 이 땅에서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인생의 삶에 생명을 예표하는 모형과 그림자가 없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이 허무함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것들 조차도 시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성도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교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함과 좌절과 우울증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없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복된 삶


만약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오직 창조주이실 뿐 구속주는 아니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알 수 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측정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나타날 수 있었듯이,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행과 고통과 허무감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할 수 있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생들이 있었기에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으로서의 혼인을 위한 것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인생은, 이 땅에서의 삶을 허무로 마감하여야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는 복된 삶이다.


대통령도 아닌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연합된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어찌 복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인생


이 땅에서의 인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인간 자신은 자기의 길을 계획하지만 이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주관하시면서 이루시는 일들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땅의 인생들은 결코 무의미한 인생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때가되면 추수를 하실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은 추수할 결실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으면, 하나님께서 추수할 결실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이 땅을 창조하시고서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에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신 것이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허무한데 굴복하였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듬뿍 나타내심으로서, 자신의 창조를 사랑으로 새롭게 다듬어 가신다.


인생 가운데 경험되어지는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과 허무등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기회를 제공해준다.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하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결실의 원동력이기에, 그 안에 담겨진 보화가 발견되어져야하는 시간들이다.



자연법에 묶인 인생


사랑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을 근거로 창조 원리를 설명하려고하지만, 과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다.


과학은 무에서의 창조를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시다.


과학으로는 부활을 설명할 수가 없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자연 과학에 대한 승리이다.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와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초월적 세계가 상실된 자연법에 묶이게 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에게는 오직 저주만 있었듯이, 자연법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오직 심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생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육신이 되었기에, 육신이 된 인생은 타락 이전에 아담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 수사 없게되었다.


과학으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설명되어질 수가 없다.


과학으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설명되어 질 수가 없다.


과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지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의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을 초월한다.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는 인생은 늙고 쇠약해지면서, 허무감에 무너져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생명을 얻은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참여되어지는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인생은 허무함에 무너져내리는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인생이기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을 감쌀지라도, 성도는 자신 안에서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여야만 한다.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는 순간들


신약이 없는 구약은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희망의 빛을 상실하였다.


구약만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끝나는 인생은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가나안 땅이 없었다면 영원한 천국을 소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영원한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이 없는 신약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신약은 구약을 근거로 존재한다.


욕심과 낙망과 좌절과 죽음이 없이는 영원한 삶을 소망할 수가 없다.


순간은 영원의 근거가 된다.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안에 생명을 품을 수 있다.


현상 가운데 담겨있는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다.


현상만을 쫓아가는 세상에서의 성공은 피상적인 것일 뿐, 그 안에는 썩을 것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세강에서 아무리 성공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고,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생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문명의 발전은 허무함이 원동력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함에 굴복하는 인생에게 생명를 주시고자하지만, 인간들은 문명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해보려고한다.


문명 기술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현상만을 쫓아갈뿐 그 안에 담겨있는 실체를 극복하지 못한체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고통의 실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지만, 현상만을 쫓아가는 문명의 기술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문명 기술 안에서 소망을 품을수록,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은 줄어들 뿐이다.


문명의 기술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들을 제거해나간다.


첨단 과학으로 표현되는 현대 문명의 현상들은, 이전의 것들을 비문명적이고 구식으로서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첨단 문명이라는 기술은 현재성의 근거가 되는 기준들을 제거해버린다.


현재의 첨단 기술은 어느 순간엔가는 구시대의 산물로 바뀌어 버린다.


현재의 기술에 의존하였던 인생들은 어느 순간엔가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있게 된다.


기술 문명에 의지한 인생들은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술 문명 사회에서는 노인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기술 사회에서 권위는 허상일 뿐이다.


어른은 결코 권위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첨단에 앞장서는 젊은이만이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문명 기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사조의 표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 자리잡을 곳이 없다.


문명 사회의 결핍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결핍으로부터 기인되지만, 문명 기술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기회를 막아버린다.


발전되어지는 문명 기술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성을 찾아보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신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덜 발달된 원시적인 곳으로 묘사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육신의 것으로 대체해버린다.


기술의 발전은 아담 안에서 반역한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개벽이라는 뜻을 지낸, 인류 최초의 도시인, 에녹이라는 성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도시 문명과 함께 고도화되는 기술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의 정신을 어이받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기술일 뿐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더 들어설 자리가 상실되어갈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척이나 멀어져간 인간들을 더 이상 놓아둘 경우 이 땅은 완전한 지옥이 될 수밖에 없기에,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말씀에 비추어 시대를 분별하여 보면, 무척이나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이다.


현 시대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기술의 문명에 의지하여, 거짓 것에 희망을 가지고 유혹을 쫓아가는 시대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

마지막 때에는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심판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짓된 유혹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상실된 기술 사회는 불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육신을 쫓아가는 인간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고도화되어가는 첨단 기술이 주는 유혹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그 속성상 영적인 몸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첨단 기술은 육체가 된 인간의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는 기술 문명에 빠진 인간들의 삶은 허무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은 오직 피에만 있다.


피가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으로 얻은 자기 만족에는 생명이 없다.


자기 만족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인간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왜곡시킬 뿐이다.


첨단 기술은 인간을 빨아들이는 매력을 가지고있지만, 그 가운데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으며, 허무만을 남길 뿐이다.


현대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평안과 행복은 생체 호르몬을 순화시켜서 더욱 삶의 의욕을 주시만, 첨단 기술은 그 특성상 인간의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만을 자극시켜서 인간을 흥분시킬 뿐이다.


공급이 없는 소비만 촉진 시킬 뿐이다.


허무함과 우울증은 공급이 없는 소비의 당연한 결과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손길이 내미셨듯이, 허무함과 우울증이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허무함과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부정적 상황 2018. 10. 14. 13:04

비판과 공격에 대한 성도의 자세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삶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비판이나 공격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비난과 공격에 직면해야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멈추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살아도, 비난과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


비난과 공격에 직면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도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비난과 공격은 조그마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적인 재앙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띄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도는 비난과 공격에 대한 자신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하기에,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공격과 반응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은 책임을 물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 추궁이었지만, 아담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비난과 공격이었다.


아담은 책임을 아내에게 돌림으로서 아내를 비난하고 공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아내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을 하였다.


하와도 뱀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서 뱀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자기를 방어하였다.


아담이나 하와 모두 다 자신의 잘못과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신들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정당화시키려고만 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을 일삼았으며, 인류의 역사는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실례를 통한 적용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들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내뱉으며 비난과 공격을 일삼는다.


한국은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에 의해서 조선이 개방되고 발전되었다고 자신들을 미화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은 조선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민족이 아니라며 거침없이 한국에 대한 혐오감을 쏟아낸다.


일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기


비록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긴 했지만, 조선에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중일 전쟁에서 패한 중국을 의존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는 일제에서 피할 길이 선교사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중국이 잘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라.


악은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기도한다.


이조 500년의 유교적 배타성에 물든 조선은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토양이었다.


일제 36년은 뿌리 깊은 조선의 배타적 토양을 갈아엎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기적 결정에 의한 재앙이었지만, 피난민들의 이동으로 인하여 지역의 배타적 텃새를 없애주었다.


지금까지 전통과 배타성에 깊이 물들어있는 강릉과 경주, 그리고 제주가 끝까지 기독교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환경이나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같이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해주지 못한다.


가시와 엉겅퀴는 물론이고, 저주를 받아 손상된 땅으로 말미암은 화산과 지진은 물론이고,변화된 기상이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진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보다도 인간들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유혹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공격을 받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느 누구도 인간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공격을 받는 것은 사람 자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의 공격을 받았던 것은, 이방인들에게서 원인을 찾기 이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기에, 죄악된 인간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참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온전하게 보호해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성경의 인물들의 반응


(요셉)


요셉은 형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형들의 공격은 요셉의 길을 이끌었던 필요악들이었다.


팔려간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대신에 요셉 자신이 가지고있었던 교만은 다스림을 받을 수 있었다.


요셉이 받았던 비난과 공격은, 욥이 자신을 저주했던 것과 같이, 요셉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요셉은 역경의 과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망 가운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윗)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었지만, 이러한 축복 뒤에 그에게 다가온 환경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난 가운데서도 다윗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 다윗에게 허락된 육체적 소욕은 그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고난 가운데 성숙되었던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애통해 하였다.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악의 한 가운데서 받은 고난으로 인하여 구속자를 간절히 원하는 준비된 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과정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공격의 연속이었지만, 예수님의 대응은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간의 원론적인 죄성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궁극적 사역은 속죄 사역이었기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의 죄를 직접 담당하셨다.


(바울)


바울을 괴롭게 하였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육체의 가시였다.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지로서, 일종의 사탄의 공격이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이 언급한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자로서 바울을 괴롭게하는 도구로 사용되고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사탄과 싸우려고하지 않았다.


사탄은 분명한 악이었지만 이는 바울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성도의 자세


성도는 일단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공격을 수용하여야한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지 말고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여러가지 형태로 복수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괴물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도 괴물이 되기도 한다는 니체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도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종종 가해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하며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한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공격과 비난은 종종 성도를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셨듯이, 성도는 교만에 대한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비난과 공격이 허락되기도한다.


자신을 따르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공격하는 이를 공격한다면, 그는 더 이상 성도이기를 포기하고 교주의 길을 가려는 자이다.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맞받아 공격하는 이들은 결코 성화의 과정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비난과 공격이 올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이스라엘이 공격을 받았던 것이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이 공격을 받을 때는 외부의 문제보다는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아야한다.


인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다.


특히 페북에서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지고있는 자들은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칭찬에 익숙한 이들은 스스로 착각에 빠지면서, 자신이 근원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업적이나 자신에 대하여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을 수용하는데 인색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없는 훈계는 공격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죄인을 더욱 죄악 가운데로 몰아간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최상의 대처법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음을 보고서 자숙하는 것이다.


성도는 죄악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에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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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상황 2018. 7. 16. 17:26

정죄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뉴스를 장식하는 것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비록 사이버 상이지만, 부정적인 상황의 주인공은 공개 처형을 당하게되며, 이들의 상태는 극도로 심각해지기도한다.


공격하는 사람은 일종의 쾌감을 느끼기도한다.


사이버 상에 공격적 댓글을 다는데 재미가 들린 사람은 습관적으로 댓글을 단다.


하지만 댓글을 실명으로한다면, 습관적으로 공격적 댓글을 다는 사람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비록 사이버 상이 아니더라도, 사회는 가십 거리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세상이 된다.


세상 사람 가운데에는 만나면 남의 얘기하고, 남의 세세한 것까지 흉보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상황은 교회에서는 비교적 절제되어있으며, 많은 사람이 덕을 세우는데 앞장 선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보면 교회도 세상 못지 않다.


세상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달라야한다.


세상에는 진리가 없기에, 정죄하고 가십거리를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의 판단은 심판하고 고소하고 정죄하는 성격을 지니고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죄에 대한 개념을 잘못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상은, 잘못된 행동 방식에 대한 것이다.


잘못된 행동 방식 때문에 잘못된 인간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짓는 행위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이미 정죄된 자이기에 남을 정죄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일종의 죄를 정하는 재판관이 하는 일의 속성을 지니고있다.


재판하는 행위는 자신은 의롭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울은 재판하는 행위 자체가 의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표면적인 행위에서는 판단하는 사람이 판단하는 대상과 다를 수 있겠지만, 속성에 있어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행위 이전에 존재의 속성에 대한 것이기에,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받는 사람이나 모두 한 가지 부류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표면적인 죄를 논하려고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좀 더 근본적인 내면의 죄에 대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의 존재론적인 죄와 행위로 인한 죄를 구분하는 잘못을 범하고있다.


이러한 구분은, 죄를 짓지 않는 자신은 의롭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면의 죄를 보지 못하고 정죄를 일삼는 바리세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칭하신 이유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자기 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에 대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거나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대상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모두에게 해당된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복음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것에 대한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결코 성경을 근거로 남을 정죄할 수는 없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인간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있는 것이다.


윤리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이들은 인간의 본질보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이는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인식을 하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이다.


기독교 윤리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정죄에 앞장서면서 윤리를 말하고있지만, 이들의 신학에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개념이 없다.


교회의 부패는 행함의 실종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학이 실종된 교회에서 아무리 윤리를 강조한다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를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의에 취해있는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2장 1절에서의 바울의 경고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부정하고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유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경고이다.


정죄에 앞장서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을 망각하고, 복음을 행위에 관한 것으로 제한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다.


복음은 행위론 이전에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자들이나, 윤리를 말하는 신학자들의 신학은, 존재론까지 들어가지 못한 행위로 귀결되는 신학들이다.


세상이 정죄하는 것과 교회에서 기독교인이 정죄하는 기준이 같다면,  이들의 행위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드러내고, 드러난 죄를 통해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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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상황 2018. 3. 3. 23:55

부정을 통한 긍정의 위험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정보를 공유하게되면서 나타나는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끊임없이 타인을 부정하는 상황이다.


특히 타인에 대하여 유난히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상황 가운데 한 가지로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불법의 흥행과 더불어 끊임없는 정죄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끊임없는 정죄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갈 뿐이다.


특히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을 긍정하는 수단으로 타인의 부정적 상황들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부정적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성도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이러한 부정적 상황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달려있다.


세상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정죄하기만 성도는 정죄하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를 하여야한다.


하지만 자칭 성도라하는 거짓된 이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편의 부정적 상황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더군다나 이들은 자신의 긍정적인 면도 곁들여서  드러내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한다.


이들은 타인의 부정적인 면을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나타내는 자신의 삶의 긍정적인 면은 도덕적인 관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부정을 통한 자신에 대한 긍정이 얼마나 심각한 악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들은 모르고있다.


특히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도덕적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부도덕을 질타하는 이들은 구약의 영역에 그쳐있거나 아니면 인본주의 신학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다.


신약에서는 은혜의 복음을 통하여 부정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하는 부정적인 면들은 인간이 근본적인 죄인임을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부정을 통한 정죄와 이를 통한 자신의 합리화는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할 복음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타인의 부정을 통한 자신의 긍정에 익숙한 이들은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바리세인들은 자신은 다르다고하면서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타인의 부정적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신학이 제대로된 사람들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을 들춰 내려고도 해서는 안되고 그러한 일이 공개되었을 때는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이 그들의 잘못된 신학때문이라고 정죄를 하면서 자신의 신학이 올바르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은혜의 복음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있음을 모를 뿐이다.


이들은 타인의 지지를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증명을 받으려고하지 않는다.


참된 성도는 타인의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부정을 돌아보아야한다.


특히 부정적 상황에 예민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경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부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부정적 상황이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학이 옳다고 말하지만 정작 잘못된 신학을 가진 사람은 비판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진실된 성도는 다른 이들을 부정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구해야한다.



(결론)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자신을 긍정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을 했다.


칼빈 교리의 핵심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부터 출발된다.


오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채찍을 들을 수가 없다.


타인을 부정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정죄이며 이들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들이다.


자식의 부정적인 모습을 본 부모가 쉽게 자식을 정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쉽게 정죄를 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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