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범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10.27 :: 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10. 27. 19:40

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야만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부 가운데 한쪽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최초의 부자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최초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으며, 창세 이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선택한 인류 최초의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할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인물이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비록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었지만,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하심으로, 천상의 세계가 인간과 함께 공존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한 인격적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었다.


인격적 존재의 자유로운 선택은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면, 아담의 인격적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되며,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아담의 범죄가 예정된 것이었다면, 아담의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이 뒤따르게되며, 아담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선악과 범죄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시기에,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인격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행위이며,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과 같은, 일종의 반역 행위인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마땅히 창조 세계의 기준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세계의 운행 원리가 되어야만 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인 인간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진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반역행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단순한 헤어짐이나 분리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집을 나간다면, 부모의 심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이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최초의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이별을 통보한 것이며, 이별을 통보받은 하나님의 마음의 찢어짐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고통을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별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무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인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추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추락한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은 단순한 연민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상실이 수반된 고통이다.


사람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신 이별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가 없다.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이별의 고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은, 이미 아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고통의 표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 세계의 실패를 그냥 수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적인 능력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격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덮으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모든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주시고, 다시는 사망으로 인한 헤어짐이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심은, 이별의 고통을 참으실 수가 없으셔서, 나락으로 추락한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택함받은 자의 눈물을 씻기우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희생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삶 가운데 겪는 모든 이별의 고통과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과 부활하심은,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해입히셨듯이, 이별은 사람이 먼저 선택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피해자이셨지만, 하나님은 정죄하시기에 앞서서, 벌거벗은 인간을 사랑으로 덧입히신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의 근원에는 아담의 범죄가 자리잡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 해결을 맛볼 수 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소망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마치 집을 떠난 자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부모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다양한 이별에 대한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아들의 위치를 방각하고 이미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먼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위치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범죄는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였으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상처를 받으신 분이시다.


삶 가운데 서로를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께 준 상처를 재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밖에 없다.


자녀를 키우면서 겪게되는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아담 안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 할 능력이 없다.


그나마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그러진 일부분일 뿐이다.


자녀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고통은, 원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져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상실되어가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모든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