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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그리스도 2018. 12. 16. 21:52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자기 의를 근거로 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로 귀결된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된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 관계에 있는 적대적인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본능을 따라 행하게되어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간섲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행하고자하는 방식은 쉽고 어려움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기준이 된다.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인간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의를 성취하려던 유대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지라도 자기의를 성취하는 것이 육신의 소욕이었기에 이를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인간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가인이 얼굴을 붉힌 것과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스스로 의인이 되려는 자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다면, 영광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게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력화 될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승리를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의 속성에 담겨있었다.


아담의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의 기준이되며, 인간이 스스로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탐심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간 스스로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데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은 일종의 하나님과의 힘겨루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인간의 공로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붕괴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한다.


가인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히고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길을 선택하였다.


가인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서의 에녹성은 개벽, 즉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독립선언이었다.


가인의 독립 선언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구체적 표현으로서 아담의 범죄의 표상이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은혜의 자리에 초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 사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부인하면서, 이미 타락한 아담 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자신의 죄를 깨닫은 백성들에게 비로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을 상기시키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유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바벨론 포로와 같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가운데 부패한 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자유가 없는 노예의지로 본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행위 구원론적 사상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패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로 삼았다.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


개혁주의의 변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개혁주의에 속하여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려는 행동을 취하게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관점과 혼합시키면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는 행위를 하고있음을 본다.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신칼빈주의를 혼합시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같은 이들을 들수 있다.


성도는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려고하지말고,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마음과 입에 가까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취하여야할 것이다.



행위 구원론적 언약적 신율주의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였다는 언약적신율주의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언약적신율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시킨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시킨다는 개념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다.


언약적신율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며,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완성시키려고한다.


이들의 행위 구원론적 행태를 그리스도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리는 행태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도 아니며, 이들에게 아담의 타락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으며, 아담의 타락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암묵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가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삶의 본을 보여준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에, 언약적 신율주의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은 예수를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이 따라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이 땅의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예수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드는 작업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부분이 없지만, 예수를 따름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림으로서,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수 있는 부분이 된다.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예수를 따름으로서 쌓으려는 공로는, 예수를 모셔내려 그 위에 올라서려는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가 없다.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외적인 선은 이 세상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일 뿐,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은 끝까지 자신에게서 의를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인간의 바램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예수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오직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변혁운동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방법 가운데 또 한가지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문화를 창조명령에 근거한 인간의 창조 행위로 보고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이 보는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들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명령에 근거한 문화변혁을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상위 개념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은,  통치명령이나 지배명령으로서, 아담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했지만, 실패한 아담의 역할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중직이 회복되었으며, 창세기 1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완성시키심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을 주셨지만,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성취하여야할 과업으로 다시 규정하고있다.


이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또 하나의 유형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natural body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의 문화는 육신을 위한 문화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의 구조는 거룩하기에, 발전의 방향을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된 인간의 문화는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구조를 가지고있기에,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와 공유될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의 참된 신앙 생활은, 문화변혁운동보다는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인간의 기술 문명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동은 비단 기독교라는 옷을 입은 이들만의 행동 양식이 아니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으며, 기술 문명은 끝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도화된다.


인간의 욕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심이 내면에 깔려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화려한 문명 기술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기에, 아무리 발전된 문명이라도 타락한 육신의 완성을 위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원시 사회에 비유를 하면서, 발전된 문명의 극치를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이다.


에덴은 원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하늘upper register과 교통이 가능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구현되었던 곳으로서, 타락하여 육신 안에 갇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문명의 발전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계시키려는 행위는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기만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이다.



자연법 앞에서 선 인간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려고했지만, 율법 앞에서 정죄받고 파멸과 심판 앞에 서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선 인간들은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의 의로움을 추구하며,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 승리를 외치려고하지만, 인간 사회의 종국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문명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고하지만, 그 종국은 하늘에서 추락한 사단과 같이 추락될 것이다.


추락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 놓여졌던 것과 같이, 추락한 현대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던지, 바깥에 있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마음과 입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들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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