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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그리스도 2019. 1. 1. 10:44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선한 행동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보게되면 일종의 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7)”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의를 근거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이들이지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이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희생적 역할을 감당하려는 이들이다.


만약에 인간이 서로 희생적으로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 세상이 살기 좋은 유토피아적 낙원이 될 수 있다면,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약에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키면서, 가나안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세상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부강하고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당위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서 세상이 낙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살아있는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막고 다시 살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서 낙원을 기대한다거나, 죽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개념은 성립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미 죽어있는 세상이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는 자신이나 이 세상이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이 아무리 평화롭게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자이기에, 최종적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생명체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지니고있었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었던 생명이 상실되면서, 인간은 죄성을 가진 육신natural body이 된 것이다(창 6:3).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서로 낙원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가 없는 곳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한다.


인간은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극단적인 불행에 직면하지 않고는 좀처럼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대부분 환경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한 환경은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환경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불행과 죽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현실적 상황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인간의 당하는 불행과 죽음은 실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체로서의 인간의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이 없다면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을 깨달을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 불행과 죽음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인간은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될 것이다.


인간의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불행과 죽음의 근원과 실체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로서의 죽음을 외면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적 선행이 죽음의 실상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추구된다면, 선은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을 외면시키는 피상적인 수고들이 인간적으로는 선한 행위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를 수반하는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실상이 죽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바리세인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식적 행위가 거짓된 악한 행위임을 지적하신다.


이와는 달리 곤궁에 처한 자를 도움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을 유형적으로 나타내고자한다면,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긍정적인 것이다.


인간의 현상적인 행복과 불행은 항상 양면을 가지고있다.


인간의 육신이 풍족한 가운데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하지도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려고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행복한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되기는 쉽지가 않다.


반대로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사람이 당하는 심각한 고통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가운데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풍요로웠으면 출애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애굽에서 풍요가 계속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림받은 민족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에야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애굽이던, 가나안이던, 인간의 풍요와 안정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궤변의 양면은 육신이 된 인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육신의 풍요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 궤변은 이스라엘만의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도 적용이 되며, 죄성은 가진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에서의 직업적 성공이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모든 상황은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은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끔 인도하여야만 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자만이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무저갱에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무저갱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과 동일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기 전까지는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찾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세상의 불행한 상황과 죽음에 직면한 상황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을 위해서 불행을 방치하는 행동은 결코 옳지 않은 극단적인 행동방식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 세상을 행복하고 죽음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로 만들어가는데 전념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삶 가운데서의 불행과 고통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긍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기회로 삼아야한다.


불행한 현실이 구원의 특별 은혜로 인도되는 통로가 된다면, 불행한 현실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있다고 할 수 있다.


성도는 불행한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가운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없이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열어갈 수는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지니고있었다.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셨던 영적인 몸이 상실됨으로서 실질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타락한 인간은 실상은 죽은 자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에게 전하는 복음으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함으로 이미 영적으로 죽었으며, 동시에 생명력이 상실된 육신이 되었다.


육신에는 죽음의 개념이 담겨있다.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실상 죽은 몸으로 살아가고있지만,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죽고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표면적인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고있는 것이며, 그 안에 참 생명은 이미 상실된 죽은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내려가심은, 육신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며,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살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신 부활체를 통해서 유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오심은,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부활을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갖게 하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신 영적인 몸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입을 영적인 몸이다.


모든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적인 몸이 부활될 것을 약속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영적인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완성될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각종 통신 매체들은 온갖 사건과 사고의 소식을 전하고있지만, 이는 죽은 인간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산자로  살아가고있는 것은, 구속사의 큰 틀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그치는 그날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영원한 죽음, 즉 무저갱에 내려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죽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의감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해보려고하지만, 이러한 행동 방식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에 속하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이 극대화된다고해서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으로 세상이 완전하여진다면, 이러한 세계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자기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며, 이러한 나라에서는 사탄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놓인 세상을 다시 찾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인간이 선행을 근거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에 근거하지 않은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삶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킨다하더라도, 그곳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이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으며, 그곳에서의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던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셔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리 마시라고 항변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하신다.


베드로가 스승을 걱정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오히려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 방식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의 한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 고통과 역경이 필요하다면, 고통과 역경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생각과 행위들이 종종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사탄의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혈연 학연 지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3:51-53)”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인간적이고 서로를 위한다고 모인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종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일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하나가 되려고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오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이며,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모임은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세상에서의 모임이 종종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기도한다.


성도는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서 모이게되어있다.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 모인 인간은, 그 공동체의 특성 안에서 서로를 상대하여야한다.


공동체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23:57)”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분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성도의 역할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등으로 제약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회의 성도들이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으로 서로 얽혀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지역 사회의 교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다.


구성원들이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등으로 얽혀있는 교회에서 온전한 믿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은 인간 관계를 견고히 할 수는 있어도, 이들이 추구하는 인간적인 관계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바울은 율법을 가진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는 혈연, 학연, 지연의 극단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행위를 책망하고있다.


이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근거로한 율법주의와 자신들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한 민족적 우월주의에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평화는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그 소중함을 알 수가 있다.


평화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이다.


평화는 사람의 삶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이된다.


전쟁은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킨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바램이며,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전쟁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평적 평화는 수직적 평화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하늘과 땅의 분리를 견고하게하는 땅에서만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


성육신과 더불어 가족 구성원간에 분쟁을 일으키신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화평을 깨신 분이시다.


하지만 수직적인 관계가 단절된 수평적 관계는 생명이 없는 관계이기에, 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평화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하나님을 배제한 하나됨은 오히려 이 세상을 사탄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진멸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어린 아이는 물론 가축까지도 죽여야만 했다.


그들의 재물과 가축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용됨으로서 부정한 것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다,


수직적인 화평은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제한된다.


인간 세상의 수평적 화평에는 거룩이라는 조건이 없다.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는 실현될 수 없다.


진정 이 땅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된 관계 안에서 평화를 추구하여야하며, 이는 실상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제한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은혜가 배제된 일반은혜의 보편화는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일반은혜의 한계내에서의 평화는 특별은혜를 대체하는 평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검을 주러오신 것과 같이, 교회는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는 거룩할 수가 없다.


톰 라이트는 종교 개혁 이후의 유럽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종교 개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평화와 진리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여야 할 경우에는 진리를 선택하여야한다.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유럽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안에서의 평화를 추구했던 사회였기에,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변화는 전쟁을 수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족 간에 불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검을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하기 때문에, 진리를 선택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인간적으로 의학의 발전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만,  궁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유전자 가위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이지만, 그 사용 목적은 하나님과 진리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인간에게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들은 잘못된 성관계로 인하여 생기는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서 에이즈에 취약한 유전자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각종 GMO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자연법을 배제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국가들은 무기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것이라고 말하지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구축은 하나님을 배제한 악의 활성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첨단 기술들은, 각자 개인이 진리의 기준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을 더욱 견고히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있다.


표면적으로는 첨단 기술로 무장된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


인간의 죽음의 상태를 더욱 견고히 하는 첨단 과학 기술은,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또 한 가지의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결론


인간의 표면적인 선행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행위가 될 때, 이는 바울이 책망하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상으로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일반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특별 은혜로 귀결 되어야한다.


기복 신앙은 인간의 죽은 육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것이다.


육신을 위한 교회는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교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교회이다.


교회 공동체가 육신을 위한 공동체가 될 때, 그 교회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한때 유행하던 비지니스처치는 육신을 위한 교회였다.


요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늘어가지만, 교회 출석 교인들은 줄어들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는 수 없이 많지만 진정 나갈 곳이 없다고 한탄하는 현상은, 대다수의 교회가 육신의 소욕을 위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육신을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비록 인간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 관점에서의, 생명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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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자기 의를 근거로 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로 귀결된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된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 관계에 있는 적대적인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본능을 따라 행하게되어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간섲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행하고자하는 방식은 쉽고 어려움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기준이 된다.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인간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의를 성취하려던 유대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지라도 자기의를 성취하는 것이 육신의 소욕이었기에 이를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인간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가인이 얼굴을 붉힌 것과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스스로 의인이 되려는 자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다면, 영광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게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력화 될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승리를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의 속성에 담겨있었다.


아담의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의 기준이되며, 인간이 스스로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탐심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간 스스로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데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은 일종의 하나님과의 힘겨루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인간의 공로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붕괴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한다.


가인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히고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길을 선택하였다.


가인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서의 에녹성은 개벽, 즉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독립선언이었다.


가인의 독립 선언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구체적 표현으로서 아담의 범죄의 표상이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은혜의 자리에 초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 사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부인하면서, 이미 타락한 아담 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자신의 죄를 깨닫은 백성들에게 비로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을 상기시키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유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바벨론 포로와 같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가운데 부패한 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자유가 없는 노예의지로 본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행위 구원론적 사상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패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로 삼았다.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


개혁주의의 변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개혁주의에 속하여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려는 행동을 취하게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관점과 혼합시키면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는 행위를 하고있음을 본다.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신칼빈주의를 혼합시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같은 이들을 들수 있다.


성도는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려고하지말고,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마음과 입에 가까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취하여야할 것이다.



행위 구원론적 언약적 신율주의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였다는 언약적신율주의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언약적신율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시킨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시킨다는 개념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다.


언약적신율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며,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완성시키려고한다.


이들의 행위 구원론적 행태를 그리스도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리는 행태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도 아니며, 이들에게 아담의 타락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으며, 아담의 타락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암묵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가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삶의 본을 보여준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에, 언약적 신율주의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은 예수를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이 따라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이 땅의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예수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드는 작업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부분이 없지만, 예수를 따름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림으로서,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수 있는 부분이 된다.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예수를 따름으로서 쌓으려는 공로는, 예수를 모셔내려 그 위에 올라서려는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가 없다.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외적인 선은 이 세상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일 뿐,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은 끝까지 자신에게서 의를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인간의 바램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예수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오직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변혁운동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방법 가운데 또 한가지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문화를 창조명령에 근거한 인간의 창조 행위로 보고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이 보는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들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명령에 근거한 문화변혁을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상위 개념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은,  통치명령이나 지배명령으로서, 아담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했지만, 실패한 아담의 역할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중직이 회복되었으며, 창세기 1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완성시키심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을 주셨지만,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성취하여야할 과업으로 다시 규정하고있다.


이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또 하나의 유형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natural body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의 문화는 육신을 위한 문화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의 구조는 거룩하기에, 발전의 방향을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된 인간의 문화는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구조를 가지고있기에,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와 공유될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의 참된 신앙 생활은, 문화변혁운동보다는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인간의 기술 문명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동은 비단 기독교라는 옷을 입은 이들만의 행동 양식이 아니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으며, 기술 문명은 끝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도화된다.


인간의 욕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심이 내면에 깔려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화려한 문명 기술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기에, 아무리 발전된 문명이라도 타락한 육신의 완성을 위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원시 사회에 비유를 하면서, 발전된 문명의 극치를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이다.


에덴은 원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하늘upper register과 교통이 가능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구현되었던 곳으로서, 타락하여 육신 안에 갇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문명의 발전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계시키려는 행위는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기만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이다.



자연법 앞에서 선 인간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려고했지만, 율법 앞에서 정죄받고 파멸과 심판 앞에 서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선 인간들은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의 의로움을 추구하며,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 승리를 외치려고하지만, 인간 사회의 종국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문명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고하지만, 그 종국은 하늘에서 추락한 사단과 같이 추락될 것이다.


추락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 놓여졌던 것과 같이, 추락한 현대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던지, 바깥에 있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마음과 입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들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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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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