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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02 :: 인간의 행악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는가?
  2. 2018.10.27 :: 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3. 2018.02.01 ::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12. 2. 18:56

인간의 행악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행악들이 이미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자유로우실 수가 없으실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들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불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이러한 인간적 이해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삼위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이라는 관점에서, 짧게나마 생각해보고자한다.



흔한 오해와 질문들


흔히들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이 말 가운데는 모든 인간의 불행한 상황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 내포되어있다.


또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면, 나의 어떠한 행동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신 것인가?”라는 의문을 낳게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하여 “내일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며,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반발하기도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게되며,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간에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운명론적이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수도 있다.


어떤 신자들은, 걱정과 근심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안식에 거한다고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기도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한 이들, 특히 칼빈주의에 속하여있다는 장로교인들의 행동 방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같은 이해부족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어야할 사항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유의지적 인격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자신들의 악한 행동까지도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오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아담의 범죄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는가?


만약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악을 행하는 이들의 악행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악행을 예정하셨다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운명론적 사고 방식은 아담의 범죄와 동시에 생긴 죄성으로 말미암은 생각이다.


아담은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이 주셔서 자기와 함께하게하신 여자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선악과를 먹게되었다고, 간접적으로 여자를 자기에게 함께하게하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린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자하는 행동 방식은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 방식이다.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도 아니시며, 아담의 선악과 범죄를 조장하신 분도 아니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선악과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에서 기인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책임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온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이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서,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훼속시키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있다.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모든 인간에 대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방관하신 책임이 없으신가?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면 음주 운전을 한 사람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음주 운전자 옆에서 음주 운전을 방관한 동승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를 보시고 범죄를 막으실 수도 있었는데, 왜 범죄를 막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마치 숨어서 교통 위반하는 차량을 기다렸다가 적발하는 순경과 같이,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범죄를 하기까지 숨어서 기다리셨다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나타나셔서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신 것인가?


그렇지 않으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려할 때에 이를 막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다.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persona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persona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이었다.


하나님의 생기가 불려 넣어진 인간은,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spiritual body였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natural body이 됨으로서, 인간 안에 넣어진 하나님의 인격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육신natural body이 되었다(창 6:3)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비록 육체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영적인 인격적 존재였으며, 어린 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존재도 아니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인간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시지 않기에,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타락한 인간은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과 더불어 지내는 것에 오히려 평안을 느끼는 왜곡된 존재이다.


인간이 왜곡된 모습에 익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의지의 상실로 인한 것이다.


처음 아담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체였기에,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적 속성을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 가운데 한 가지는 자유 의지와 서로의 의사 결정에 대한 존중이다.


만약에 인간이 가지고있는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 가운데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없이 상하 관계로 형성된 강압적인 행동 방식이 있다면, 인간은 온전한 인격체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강압적인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하였을 때, 자신들이 결정한 행동 방식이 인격적으로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반대하고 막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진정한 인격체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에, 부모가 생각하는 미성숙한 자녀에 대한 간섭과 보호의 개념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아담과 하와는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로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성숙되어진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인격체로서 지음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모든 행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자신들 스스로가 결정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스스로의 인격적 결정에 의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실상 사단의 종이 됨으로서, 인격체로서 가지고있던 자유 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사단에게 종 노릇하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있으며,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지 못함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인격적 자유 의지의 상실과 더불어 사단에 종속되어 노예 의지를 가지게 된 타락한 인간의 행동 방식은, 스스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죽음에 이르는 악을 창출할 뿐이다.



악에 대하여 무책임한 운명론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있던 인격적 자유 의지가 붕괴된 인간은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모든 행함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고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인간은 이미 선을 행할 지혜와 능력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손상된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 방식에 대하여 더 이상 책임을 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의 필수 구성 요소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의 운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책임있는 능동적 태도를 취하려고하지 않게 만든다.


심지어 섬범죄자가된 목회자조차도 자신의 범죄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옥의 티 정도로 여기면서,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있기에 어쩔 수 없다면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도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타락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유 의지를 회복하는 책임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성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한다.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모르는 행동 방식은, 자신에게 참된 자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자신은 종의 의지, 즉 노예 의지에 묶여있는 존재이며,이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또 다른 범죄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여 거룩에 참여된 성도라면, 죄에 대하여 극히 예민하여야한다.


거룩은 죄로부터의 분리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더불어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성도의 죄는 반드시 회개의 기도가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인격적 관계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은 성도의 회복된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악행이라는 적극적 죄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에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는 일에 참여되기에, 항상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려야한다.


성도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어야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성도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운명론적인 예정이라는 개념을 적용시켜서, 죄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면 안된다.


성도의 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가운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나타내야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다시 함께하는 것이며, 처음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유 의지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를 향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성도 안에서 회복되는  인격적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로봇과 같이 기계적으로 성도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인도하셨고, 야곱을 간섭하셨던 것과 같이, 인격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성도의 길을 인도하심으로서,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 들어오도록 하신다.


성도가 걷는 성화의 과정은, 스스로 시행 착오를 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되어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적 회복의 과정이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과 간섭하심은, 성도의 인격이 존중되어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간섭하심이다.



일반은혜와 인간의 죄악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비할 수 있도록 하셨고, 가룟인 유대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가서 예수를 팔도록 허락하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과 악행의 주체는 구분되어야한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마땅히 영원한 멸망 가운데 죽어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자 모든 인간의 죄를 억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하는 일반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시는 일반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셨다고 악행을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축복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 가운데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인간의 불행과 악행은 철저하게 타락하여 사단의 종노릇하는 인간과 사단의 합작품일 뿐이다.


인간의 악행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아담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악행을 행하려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있을 뿐이며, 하나님은 이를 억제하시며 은혜를 베푸실 뿐이다.



삶 가운데의 불행한 일들


성도라고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불행에서 자유할 수는 없다.


성도의 불행은 성도 자신의 잘못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범죄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있다.


제초제를 과도하게 사용한 농산물을 먹고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정죄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중국에서 날아온 비세먼지로 인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은 억울한 마음뿐일 것이다.


GMO농산물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가축은 대부분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GMO농산물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항생제와 살충제에 노출되면서 사육되어질 수 밖에 없기에,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축산물을 피할 수는 없다.


문명의 혜택 못지 않게 많은 미세먼지와 소음공해와 빛공해, 그리고 높은 주거비등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고있으며, 이로인한 스트레스와 질병은 성도라고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성도라는 이유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과 지진과 쓰나미의 재앙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신으로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삶 가운데 끊임없는 불행에 노출될 수 밖에 없지만, 이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아담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결정된 것이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아담이 선택한 하나님을 떠난 삶의 후유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하여야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불행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은혜를 은혜로 인식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어버려둠으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때,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서야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스스로의 풍요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불행이 없이는, 하나님없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육신의 풍요를 누리는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원적인 은혜를 누리는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과 자연법은 죄를 고발하면서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과 자연법은 타락한 인간 사회의 극단적인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도구가 되며, 인간의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를 깨달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고통이 있었기에 가나안을 향한 여정이 시작될 수 있었다.


택한 자가 그리스도께 인도되기 위해서는 삶에서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자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안락에 취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인간의 악행 한 가운데서 예정하심과 섭리로 모든 상황을 간섭하신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침묵하시고, 택한 자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도록 내어버려두시는 시간들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시간은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간섭하시는 시간들이다.


인간이 불행 가운데 있는 시간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파멸의 시간이지만, 구원받을 자에게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는 희망의 시간들이다.


죄인으로서 죄를 짓는 행위는, 사단의 종으로서 짓는 행위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행들 한 가운데에서도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보편적인 악을 제어하고 통제하신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겼지만, 가룟유다의 행동이 하나님의 예정과 간섭을 결과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완고하고 악해질 수 밖에 없기에, 인간의 완고함과 악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완전한 어둠은 빛의 소멸이기에, 은혜의 빛을 거두어가신다고 하나님께서 어둠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둠 가운데있는 인간의 악행까지도 사용하셔서 구원받을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는 빛이 당연히 비추어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보편적인 일반은혜를 베푸심으로, 인간 사회에 어느 정도의 선을 유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혜는 당연한 것도 아니며,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인간의 악행을 합력하여 선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악행이나 불행과 더불어 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룟유다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셨고, 그 소욕대로 행하게  내어버려두셨으며, 이를 아시고 사용하셨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불행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런 불행이 일어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부정하기도하지만, 이는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어나가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힘들기도하지만,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존재이기에, 삶에서의 불행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타락한 인간에게 불행이 없다면, 이러한 세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으신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시기보다는, 이를 사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행을 조장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인간들을 죄악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불행들에 내어버려두심으로서,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자로 내어버려두시고, 택한 자는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불행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과 불행을 미리 사전에 간섭하셔서 차단하신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가정해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과 모든 축복을  경험하고도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간섭을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고해더라도,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위로부터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면, 아래로부터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불행 가운데 내어버려진 인간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불행을 겪고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옴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불행한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렇다고 불행과 악이 사용되어진다고, 하나님께서 악의 주체가 되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길을 갈뿐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내어버려두심으로,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어떠한 악이라도, 이를 사용하셔서 택한 자에게 선을 이루어가시지만, 하나님이 행동의 주체가 되시는 예정은 악의 주체와 분리되어 해석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셔서 인간의 악행을 막으신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상실하게되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간만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선택한 악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를 구원의 기회로 사용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원망하는 이들의 소원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막아주신다면 세상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자문해본다.


통증의 경고등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몸의 잘못되어가는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을 것이며, 결국 몸은 망가져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의 행악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교만은 극에 달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또 다른 형태로 파국을 맞이 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해도 불행이 발생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동 방식은 무책임하고 통제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행들은, 악을 제어하는 기능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해주는 필요악이다.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삼위 하나님의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격체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존중을 받아야만 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는 자신의 행동의 결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선악과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결정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언약이라는 형태로 아담에게 주어졌기에, 아담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언약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언약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기반으로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로 결정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 스스로의 인격적 결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악과 언약이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겠다는 독립 선언이었으며, 반역이었다.


아담은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자유 의지,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결정하는 인격적인 자유 의지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가 최종적인 결정의 주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담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더불어 인격적 자유 의지는 상실되었다.


인간의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배제하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서로를 존중해주고 서로와 대립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근거로한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이러한 자유 의지는 하나님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기로 한 사단의 반역을 이어받는데 사용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자신이 최종적 결정의 주체가 되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하여 왕으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려야했지만, 반역한 아담은 오히여 피조세계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이는 오직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 관계가 형성이 될 때 완전하여지는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새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타락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어진 결과를 가져왔다.


타락한 인간에 남아있는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제대로 투영될 수가 없으며, 이로 인하여 스스로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의지와 능력이 상실되어버렸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는 악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악행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도 아니며, 자신도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왔으며,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좀비와 같이, 악의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이 행하는 온갖 악행도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문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운명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마땅히 이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사용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악의 통로로 사용되고있는 불행한 상황은 결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정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새언약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예정이라는 용어에 담겨있는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행하는 악의 주체는 사단이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한 행동을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자신의 섭리 가운데 이러한 악마저도 사용하셔서, 창세 전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뿐이다.



구원과 유기의 이중 예정


칼빈은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에 대한 이중 예정을 말하고있다.


구원을 예정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시면서, 구원받을 자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되도록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고 유기될 자를 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악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죽기로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의 악행은 하나님께서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자를 내어버려두신 결과일 뿐이다.


선행과 악행은 인간의 구원과 유기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들이기에, 이들은 선행과 악행 이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지만, 이들이 은혜 가운데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행하는 선이 구원을 이루는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악한 이들에게도 임하는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악을 어느 정도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다.


유기될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유기되는 것일 뿐이지, 하나임께서 그들의 악을 예정하고,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조장하시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과 행위


구원과 유기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구원과 유기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적용되어야하는 것이다.


선행과 악행이라는 행위는 구원과 유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예정의 중심은 선행과 악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이기에, 알미나안들의 주장과 같이, 그들이 악을 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알미니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는 이들이 선을 행할 것을 아시고 구원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근본적 오해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과 연결시키면서 생기게되는 것이다.


유기에 대한 예정은 인간의 행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예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악한 자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심은, 그들에게서 일반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일어나는 결과적인 현상일 뿐이지, 이들의 행악을 하나님께서 조장하시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된 인간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다.(창 6:3)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영적인 속성을 담고있었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다함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상의 세계와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인간이 사는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천상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과 분리된 타락한 육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 즉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땅과 하늘의 연합은 이 땅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분리된 하늘과 땅은, 거룩과의 단절이었으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 속하여있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천상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하나임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지만,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않을 뿐더러,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습은 선택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힘들게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가,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모양만 있을 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빈껍질일 뿐이다.


거룩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거룩한 하늘과 분리된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한 육신이 된 인간의 악행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여지가 없기에, 이들의 악행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악한 변명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라도, 이들의 악한 행동 마저도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실 뿐이다.



상실된 자유의지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개념은, 인간의 노예 의지, 혹은 종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특히나 인간의 행위를 구원과 연결시키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루터의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하여 많은 반발을 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을 아담과 연계시키지도 않으며,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도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 안에서 상실된 자유 의지의 회복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자유 의지가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타락 이전에는 인간에게 담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았다.


책임있는 행동은 존중되어져야만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행동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예정에 의하여 행해지는 행동은 진정한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락으로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이 존중되어질 수도 없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기에,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않으며, 내면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도 형태만 남아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격적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는 육의 소욕만을 쫓아가는 본능적 의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육의 소욕을 쫓아서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의지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를 노예의지, 혹은 종의 의지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하려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마13:34)


인간적으로는 유대인들만큼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이들의 행함마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행동일 뿐이다.


독사의 새끼들이 행하는 악은 결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구원을 이루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실 뿐이다.


가룟 유다의 악행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의인이 되어야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 즉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 행한 것이었고, 사단에게 쓰임을 받았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딘의 종노릇하는 가룟 유다를 사용하심으로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이 땅에서 행하신 것이다.


가룟 유다는 악한 행동을 하여서 심판받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악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구원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가 없었기에, 최고의 기회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육신의 소욕을 좇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최고의 기회를 최악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죄성에 의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찾은 인간


성도가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성도와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갈2:20),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이 되었다.


아담 안에서 육신인 된 상황이 변하여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의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치게되어있다.


성도의 내면에서의 인격적 회복은, 마치 재활 치료와 같이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일종의 성화의 과정인 것이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며, 성화의 과정은 성도의 인격이 무시되지는 않는 범위에서 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는 참 자유를 얻게되며, 참 자유 안에 거하는 성도는 자유 의지를 소유하게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성도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인격적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완성시켜 나아가지만, 인격과 자유를 연계시켜 생각해볼 때, 성도의 인격적 행동이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정은, 아직도 육신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개별 행동에 관한 것보다는 구원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성도 안에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예정은,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성도의 행함을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만 해석한다면, 진리 안에 있는 성도에게 참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예정은,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한 삼위 하나님의 종합적인 사역에 의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 때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 의지에 의한 삼위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을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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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야만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부 가운데 한쪽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최초의 부자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최초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으며, 창세 이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선택한 인류 최초의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할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인물이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비록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었지만,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하심으로, 천상의 세계가 인간과 함께 공존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한 인격적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었다.


인격적 존재의 자유로운 선택은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면, 아담의 인격적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되며,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아담의 범죄가 예정된 것이었다면, 아담의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이 뒤따르게되며, 아담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선악과 범죄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시기에,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인격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행위이며,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과 같은, 일종의 반역 행위인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마땅히 창조 세계의 기준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세계의 운행 원리가 되어야만 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인 인간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진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반역행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단순한 헤어짐이나 분리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집을 나간다면, 부모의 심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이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최초의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이별을 통보한 것이며, 이별을 통보받은 하나님의 마음의 찢어짐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고통을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별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무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인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추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추락한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은 단순한 연민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상실이 수반된 고통이다.


사람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신 이별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가 없다.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이별의 고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은, 이미 아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고통의 표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 세계의 실패를 그냥 수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적인 능력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격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덮으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모든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주시고, 다시는 사망으로 인한 헤어짐이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심은, 이별의 고통을 참으실 수가 없으셔서, 나락으로 추락한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택함받은 자의 눈물을 씻기우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희생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삶 가운데 겪는 모든 이별의 고통과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과 부활하심은,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해입히셨듯이, 이별은 사람이 먼저 선택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피해자이셨지만, 하나님은 정죄하시기에 앞서서, 벌거벗은 인간을 사랑으로 덧입히신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의 근원에는 아담의 범죄가 자리잡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 해결을 맛볼 수 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소망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마치 집을 떠난 자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부모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다양한 이별에 대한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아들의 위치를 방각하고 이미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먼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위치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범죄는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였으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상처를 받으신 분이시다.


삶 가운데 서로를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께 준 상처를 재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밖에 없다.


자녀를 키우면서 겪게되는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아담 안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 할 능력이 없다.


그나마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그러진 일부분일 뿐이다.


자녀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고통은, 원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져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상실되어가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모든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2. 1. 17:41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재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규정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간에 인격적 관계가 요구되는 가운데 사회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과의 긴장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인격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 안에 담겨있는 인격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인격체persona로서는 세 분이시지만 본질substantia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 분 하나님의 공동체적 인격이 내포되어있다.


세분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세 분을 하나의 본질로 연합하여 일체를 형성한다.


인간의 인격을 통한 공동체적 관계성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통한 연합체를 결성한다.


인간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져있는 인격의 표현에서 나온 것이며, 이상적인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구현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아담의 범죄와 손상된 인격


아담의 불순종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파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조물로서의 아담 안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규명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공동체적 관계성을 유지해주었지만, 불순종에 의한 관계성의 파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손상을 가져왔다.


삼위 하나님의 서로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피조물인 아담에게는 순종으로 요구되었으며,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방법이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되는 법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관계성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상실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관계성의 파괴는 인간이 지니고있던 인격의 손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존중해주는 인격의 손상을 가져왔다.


인간 안에 담겨있던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손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으로 존중받던 인간이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단의 종으로 바뀌었다.


자녀와 종의 차이는 인격이 유지 되는 관계냐 아니면 상실 된 관계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사단의 종이되었기에 그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삼위 하나님의 위격이 존중받듯이, 존중을 받을 수는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하고자 할 때 즉시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아담과 이브는 존중받는 인격체였기에 선택에 대해서도 존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타락 이후의 비인격적 사건들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역사는 인격이 상실된 인간들이 어떠한지를 고발하는 역사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해서 살겠다는 표시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개벽이라는 뜻의 에녹성을 쌓고서 아들의 이름도 에녹이라고 지었다.


인간 스스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관계성의 파괴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도시 문명이 발달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들은, 모든 신들의 출발지로서, 우상 숭배와 더불어 시작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유래된 각종 신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타락한 인간을 더욱 더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래된 신들로 만연한 가나안의 우상들과의 싸움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체와 가나안의 비인격체와의 싸움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격적으로 대하셨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 안에서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이 얼마나 비인격적이 되었는지를 고발하는 역사였다.



비인격적인 현대 도시 문화


최초의 도시는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이었으며, 도시의 성격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도시에서는 도시의 특성상 서로에게서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도시가, 자연을 의지하는 농촌과는 달리, 경제 원리로 운영되기에, 도시 구성원은 서로에 대한 필요 관계로 구성될 수 밖에 없다.


현대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상이 돈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현대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확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도시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도시의 보편화는 그나마 인간 안에 남아있던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더욱 비인격적으로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는 것은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일그러진 형상이 더욱 일그러져 사랑을 주고 받을 만한 인격적 요소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담 안에서 비인격적 존재이로 남아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마치 수술 받은 환자가 재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이, 성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나아간다.


성도 안에서의 인격의 회복은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도를 통한 인격의 회복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표현 방법이다.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인격체로서의 권리이다.


자신을 표현하며, 표현된 내용이 존중을 받을 때 비로서 진정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존중받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성숙된 기도는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교회 공동체와 인격의 회복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 공동체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체로서 구현되는 곳이다.


설교와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존중받는 인격체로서의 활동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인격체의 성장을 위해서 성화라는 성장 과정이 요구된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인격체의 성장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았기에, 신앙생활은 회복된 인격체로서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가 사회에서도 모든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만 한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의 인격적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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