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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1. 10. 13. 20:13

요한복음 1장 11절을 통해본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오류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정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 실은 잘못된 관점인 것이다.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명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성당의 벽화에서는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의 벽화를 통해서 교회 차원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지속하기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유대인 핍박에 대한 표면적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기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도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으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꾸지 않고는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을 들 수 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유대주의적으로 바꾸면서, 율법주의를 신율주의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따름의 대상으로,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구원론 등을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시도들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관점은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 11절을 묵상하며 살펴보고자한다.



창조주의 주권을 위한 언약공동체

 

예수를 죽였다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덴 공동체는 타락 이전의 공동체였지만, 타락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 공동체의 특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주어졌던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졌던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거하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단순한 소유권의 행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임함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한 조건적 축복으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렇게 위임을 받고 형성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며, 에덴은 최초의 언약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 후에 만들어진, 처음 언약 공동체였던 에덴의 재연이었다.

 

처음 에덴공동체에서의 아담이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산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된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언약공동체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분리를 전제로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거절을 당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에덴은 타락을 수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불순종한 아담에게는 거주가 허락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하지 못하였기에 거룩하신 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절을 당하셨던  곳이었으며, 거룩이 상실된 곳이었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이 땅에서 에덴은 상실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사람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에덴 성전은 순종이 요구되었던 곳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순종이 완성된 곳이다.



언약 백성의 대표성

 

에덴에서의 아담은 최초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의 역할은 순종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를 가져왔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유지,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온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온전하게 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공동체가 살아가는 자기 땅에 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인류의 범죄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민족의 범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죄성이 어떠한 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어둠은 알지 못했으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구약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는 포도원 지기들이 포도원 주인을 거부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이 유대인들만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유효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희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였으며, 예수의 죽으심으로만 처음 아담의 범죄에 대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처형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제한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정된 자의 구원은 대표성 안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은 정당한가?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변해준다.

 

에덴이 창조 세계를 대표하였듯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특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변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는 존재이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시키거나 차별화시켜서는 않된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여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자신들의 죄가 아닌 유대인들만의 죄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였고, 급기야는 홀로코스트라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교회는 유대인 박해의 주체가 되기도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오셨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죄악으로 돌아가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었고, 신자는 둘째 아담 안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의 표현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이스라엘이시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에 숨었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변한 것이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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