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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2018. 10. 14. 11:46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과 불완전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창조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하는 목적은, 아담의 범죄가 창조된 아담의 미성숙함이라는 원인을 주장하는 이들과, 에덴이라는 환경의 불완전성이 아담의 타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들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기에, 짧막하게나마 이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생각들을 정리해보고자한다.


현대는 여러면에서 발전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사고의 발전 못지 않게, 과학적 학문과 기술도 발전되어있다.


현대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거는 발전이 될 된 미성숙한 사회였으며, 고대 사회는 원시 사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과거로 갈 수록 기술이 덜 발달된 구석기 시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은 구석기 시대였으며, 아담은 원시인이었을까?


발전이라는 용어는 창조된 인간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미완성과 불완전함을 전제로하고있다.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기술적 개념이다.


철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경험론적 합리주의에 근거한 현대철학은 이성을 중심으로하는 헬라 철학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험적 합리주의에 합류한 현대신학도 발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을 배제한 경험적 합리주의는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성에 대하여 혼란을 겪게된다.


신학은 계시를 근거로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과학적 경험주의에서 점점 더 설 자리를 상실해 가고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역사를 수 억년까지 연장시키면서, 우주의 탄생을 빅뱅의 원리와 접목시키고있다.


이러한 양상은 계시의 과학성이라는 해결될 수 없는 주제를 도출시킨다.


창세기에 서술된 창조 기사라는 계시를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는 수 많은 논제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경험적 합리주의라는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은 지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미개한 원시인으로 창조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지식이나 기술의 발전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되기에, 경험되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존재들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의 발전은 표상적 도출일 뿐 인간의 존재론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며, 영적인 발전도  아니다.


과학은 단지 인간의 외적인 삶을 풍요하게해주는 수단일 뿐이며, 경험되어지는 세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수단일 뿐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붕괴는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붕괴이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과학 기술 세계에서의 인간 사이에는 연결될 수 없는 커다란 단절이 있다.


육적인 인간이 사용하는 과학 기술은 영적인 세계까지 이어지지 못하기에, 아무리 발달된 과학이라도 에덴에서의 아담까지를 이어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였던 영적인 존재가, 하나님을 피하고 외면하는 육적인 존재로 변한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육신이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았지만, 타락 이후에는 육신이 영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담의 벗었음은 영적인 아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타락한 이후에는 벗은 육신의 지배를 받아 수치를 가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의 발전은 수치를 가리고, 육신만을 풍요롭게하고자하는,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육적인 것에 제한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발전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육신에 제한된 관점에서의 발전이기에,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육신의 관점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교만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였는가?


인간은 누구나 종종 이전의 것은 발전이 덜된 구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일 뿐이다.


기술의 역사는 최초의 도시인 에녹성을 지은 가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술은 에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기술에 의존하는 육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기술은 타락과 더불어 육적인 존재가 된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영적인 세계를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첨단 과학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는 육적인 재능의 표출일 뿐이며, 타락한 인간의 육적인 소욕을 채워줄 뿐이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었기에, 기술의 발전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타락 이전의 에덴은 발전과 무관하며, 발전을 필요로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였다.


발전의 개념을 에덴까지 적용하는 것은, 에덴을 육적인 곳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며, 불완전한 미완성의 세계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타락이 아담의 불완전성이나 미성숙에 의한 타락이었다면, 창조주는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에 대한 책임감에 기인한 것이 된다.


창조의 불완전성에 의한 타락에서의 구속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다.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타락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어야한다.


만약에 인간의 타락이 창세 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정된 것이라면, 타락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아담의 창조가 불완전한 미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책임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섭리로 하나님께 원인을 둔다면, 인간은 타락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시며, 아담의 범죄는 인간에게 부여된 존중받아야 할 자유 의지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투영된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자유 의지를 가진 완전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수명이 크게 단축이 된 것은 자율적 결정에 의한 악을 제어함으로서 창조 세계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사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인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학 기술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개발하고 발전시킨 기술들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기술을 부여시키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신학을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분석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오류라는 낙인을 찍고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존재였기에, 완전한 창조 세계를 온전하게 보존 할 수 있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창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관계로 인하여, 여러가지의 한계 안에 갇힐 수 밖에 없게되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육신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주관하던 피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존재로서,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파괴의 주체가 되었다.


처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발전을 필요로하였던, 미완성의 미개한 원시 세계가 아니라, 아담이 가졌던 자유 의지의 완전성 만큼이나, 오히려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하나님은 완전한 피조계를 창조하셨다


창조된 아담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피조 세계는 아담의 창조의 완전성만큼이나 완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실만큼 피조 세계는 완전히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에는 아담도 포함되어있었다.


피조계가 혼돈과 무질서에서 점진적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되어야만 하는 원시 세계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심히 좋았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의 급속한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실 만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처음은 완전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서로 교통이 되었던 거룩한 곳이었다.


순종은 피조 세계가 천상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조건이었다.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거룩한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천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지상의 세계lower-register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지상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만큼이나 거룩하고 완전한 곳이었다.


지상의 세계는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아담이 지배하던 피조세계의 불순종으로 확대되었으며, 타락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한 인간이 지배하는 피조 세계는 혼돈과 탄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는 자의 불순종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왔다.


지진과 화산 폭발과 환경의 재앙은 거룩함이 상실된 땅의 붕괴된 모습의 한 단면일 뿐이다.


완전했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타락에 비례하여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하여 스스로 독립적인 길을 걸어야만 했다.


현재의 문명화된 도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개벽을 의미하는 에녹에서 부터 출발된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성을 하나님과 분리된 에녹이라고 지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까지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음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분리되기를 원했다.


현대 도시 문명은 에녹의 결실이었으며, 외적인 화려함 만큼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처음 창조 세계의 모습을 파괴시키고, 육신이 된 인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있다.



과학적 사고의 한계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천상의 영역과의 교통이 단절된 인간은 지상의 영역의 한계내에서만 사고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졌지만, 인간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있지만, 인간은 과학과 이성의 한계로 인하여 이를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가 없다.


성경이 과학적 사고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신학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성경을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이야기로 접근해보려고하지만, 이는 사람을 해부하여 생명과 영혼에 대하여 분석해보려는 방법과 한 가지 일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인간의 지적인 이해 방식의 연장선에 있을 수가 없다.


창조 과학자들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려고하지만, 이는 성경이 많은 부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과학적 사고는 천상의 영역과 분리되어 지상의 영역에 갇힌 타락한 인간의 사고 체계일 뿐이다.


천상의 세계가 감추어져있는 만큼, 처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계시는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성경 말씀은 오직 믿음 안에서 성령이 증거하실 뿐이다.


수 천년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서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창조를 증명해내지도 못했다.


말씀이 없는 자연신학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 설명될 수가 없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에서 유로의 변화 뿐이다.


창조는 무에서 (ex nihilo) 유로의 창조여야만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창조가 아니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비과학적 주장 가운데 한 가지는 원소의 변이이다.


원소는 고유한 성질을 갖는 원자로 구성되어있어 변이가 일어날 수가 없다.


진화론으로는 물질을 구성하는 103개의 원소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또한 진화론은,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의 법칙을 어기고, 획득 형질에 근거한 변이를 말하는 비과학적인 논리를 근거로 하고있다.


과학을 말하는 진화론의 논리는 가장 비과학적인 논리이기에, 하나의 이론일 뿐 과학적 사고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과학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시간과 빅뱅을 말하는 과학까지도 포함되어있기에 창조된 과학으로 창조를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철학과 과학의 한계 안에서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까지 포함되어있다.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하다.


창조된 인간은 공동체적으로 무리를 이루면서 살기에, 공동체적 삶의 흔적만이 연대를 증명해줄 뿐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문명의 유적은 성경의 증거와같이, 수천년에 한정되어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를 통해서 뿐이다.


말씀에 대한 이해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만약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인간이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면, 하나님의 탄생의 시간에 대하여 어떻게 결론을 내릴 지 궁금하기만 하다.



가리워진 천상의 세계


천상의 영역이 가리워진 상태에서 인간의 과학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였다면, 오병이어에 나누어진 떡과 물고기는 어떻게 추수되어진 것이고, 어떻게 잡은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추수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물고기를 잡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시간을 부여하여 지구의 탄생을 수 억년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에 갇힌 육신이 된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전의 존재 형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있다.


아무리 해부학이 발달되어도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있었는지, 성령의 내주하심은 어떠한 형태였는지 알수있는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간섭하심은 과학적으로 발견될 수가 없다.


진리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인 것과 같이, 진리가 과학으로 발견되어질 수 있다면, 진리는 더 이상 감추어진 보화가 될 수가 없다.


진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으며, 믿음은 성령의 간섭하심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지식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육신이 되기 이전에 공유되었던 천상의 세계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면서,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땅의 처음 시작과 마지막은 천상의 세계와 공유되는 형태이지만, 과학은 이를 증명 할 수가 없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천상의 세계가 없다고한다면, 하나님과 천사들도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존재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거나,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수정하려고해서는 안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도 아니다.


혼돈과 무질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인해서,  완성된 창조 세계가 탄생된 것이었다.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구조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믿음은 육신이 된 인간에게 부여된, 천상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다.


말씀은, 과학과 이성의 한계로 인해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믿음이 없이 성경을 대한다면, 천상의 세계를 알 수가 없을 뿐더러, 피조계를 보는 한계 안에 갇히게 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이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신념일 뿐이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과 함께 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다.


타락 후에 육신이 된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기에 더 이상 천상의 세계를 함께 공유할 수가 없었다.


가리워진 천상의 세계는 과학적 인간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며, 인간은 지상 세계의 과학에 갇혀서, 과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죽음에 갇히게 된 것이다.



문화명령과 창조명령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의 발전을 결합시킨, 창조 명령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창조명령이라는 개념은,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을 대표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의 기본 개념이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리키는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이라는 개념은, 흔히들 말하는 문화명령과 유사한 개념이다.


창조명령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으로서,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연장선에서 행하여지는 행위로서, 이는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라는 것이다.


창조명령의 배경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종말에 완성될 미완성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미완성과 완성의 사이에는 문화와 기술이 채워지는 것이다.


알버트가 창조명령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하며, 에덴을 발전이 되지 않은 원시 사회로 본다.


알버트는 인간의 문명의 발전을 창조적 발전, 즉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봄으로서, 태초의 미성숙한 원시 세계를 인간의 창조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알버트가 가리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창조명령에 근거한 문화 활동을 기반으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을 통해서, 인간의 발전된 문화가 천국 문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이 문명의 발전의 구조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수정하여, 천국에 보존될 올바른 방향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가야한다는 것이다.


발전과 문화물의 천국보존의 개념에는, 에덴의 성전으로서의 기능과, 아담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배제되어있다.


문화명령, 혹은 창조명령의 개념은,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통치명령(창1:28)을 완성시키셨다고 보지 않는다.


창조명령, 혹은 문화명령의 개념에는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에덴에서의 목적은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사역은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시키시고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창세기 1장 28절(창조명령, 문화명령, 통치명령)을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한 문화 명령으로 규정하고서,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의 문화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을 다시 시작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 28절은 아담의 3중직이 표현된 통치명령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명령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이러한 명령을 다시 실행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에덴은 문화명령을 통해서 발전되어야할, 인간적 개념의 미성숙과 미완성의 세계가 아니었다.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은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인격적 자유 의지를 지니고, 하나님의 영과 함께한, 흙으로 지음받은 완전한 영적인 존재였다.


에덴이라는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에덴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단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이었으며, 완전한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적 발전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에덴의 영적 속성을 제거하고 육적인 개념에서만 출발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 세계의 육적인 한계 안에 갇혀있다.


피조 세계의 육적인 한계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어떠한 인간적 노력과 과학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타락 이전의 에덴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불가능하다.


이성의 한계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자연신학의 한계 안에서의 신인식에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결론


발전이라는 개념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불완전성을 말함으로서, 아담의 범죄에 하나님께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으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발전의 개념은 자칫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원과 은혜의 속성을 바꾸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자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먹었다고 말함으로서, 책임을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있다.


발전이라는 개념에는 아담의 타락의 원인에 하나님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창조 원인이 있었다는, 책임 회피적인 성격이 담겨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는 어떠한 환경적 핑계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아담의 범죄는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원시적 형태와 미완성을 주장하면서, 마땅히 구원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창조적 발전이라는 개념은 에덴의 본래의 목적이나 특성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락한 인간의 육적인 발상일 뿐이다.


불완전성은 오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만 생각되어져야한다.


에덴은 자유 의지가 있는 완전한 세계였으며, 하나님의 영이 아담과 함께 한 곳이었지만, 피조물의 순종이 요구되는 불완전한 하나님 나라였다.


불완전성은 오직 인간의 의지적 불순종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인간이 불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에는 존중되어져야만 하는 자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시고 이를 막으셨다면, 아담의 자유 의지는 존중되어지는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자유 의지는 존중되어져야만 하고, 대신에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에덴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있던 아담에게 요구되어졌던 것은, 선악과 금령 뿐만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에서와 같이 통치 명령이 추가되었다.


통치 명령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확장이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불순종한 인간만을 낳을 뿐이다.


통치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아담의 3중직은 그리스도의 3중직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아담은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로서,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관리하는 자였다.


에덴이 성전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피조 세계가 에덴보다 나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만 에덴보다 나아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에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에서 목표로하였던,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임한, 완성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면 안 된다.


칼 바르트는 창조 역사를 인간의 역사(Historie)와 구분되는 원역사(Urgeschichte)로 규정하지만, 이 또한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다.


원역사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실존주의적 인식의 틀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배제하는 인간적인 방법에서 나온 대안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아담과 더불어 창조된 피조계는 완전한 세계였으며, 인간의 발전은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하였던 창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역방향으로의 발전이다.


아담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적 존재였기에,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였던 아담의 범죄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선악을 결정하는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로 함으로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었다.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발달된 인간 문명의 종착지이나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각자의 판단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더 이상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도 아니며, 말씀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판단의 기준이라는 관점에서본다면,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발전이 아니라, 가장 붕괴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의 기준이시며,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만이 진리가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일 때,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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