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21. 10. 13. 20:17

요한복음 1장 11절에 비춰본 톰 라이트의 거짓말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들

 

새관점주의자들은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항하는 행동 방식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3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로마와 타협하고 아부하며 빌어붙어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다.

 

두 번째는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숨어사는 도피자들이다.

 

세번째는 로마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열혈주의자들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세가지 유형이 전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대변해준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할지, 희생적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은 로마였으며,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 당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예수는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를 자기 백성, 즉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2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있다.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이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

 

행위가 요구되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며, 새관점의 예수는 안식의 주인이 아니며,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왜곡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를 유대교 친화적으로 바꿈으로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새관점과 홀로코스트

 

예수를 로마인이 죽였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결코 현대 유대인들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새관점은 유대주의적인 노력이 많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http://www.reformanda.co.kr/theoJournal/98428)

 

새관점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있어왔던 여러 자유주의학자들의 주장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적 관점들과 성경신학적 관점들이 성경 자체를 근거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새관점은 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한 1세기 제2성전 유대교”, “슈바이처의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라는 3가지가 주된 틀로 구성되어있다.

 

새관점의 출현의 배경에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 있다.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의 예수에 대한 해석을 취합하여 새로운 의를 산출해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새관점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복음을 유대교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최소화시킨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삼위일체적 예수라고 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 된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려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있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을 강조하며, 신약의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실 때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다.

 

어둠과 빛, 주검과 생명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이시며, 연장과 확장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가 없는 단절된 반대의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표면적인 개념이다.

 

이면적으로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만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만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 주장들은 기독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거짓된 결과물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 2021. 10. 13. 20:13

요한복음 1장 11절을 통해본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오류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정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 실은 잘못된 관점인 것이다.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명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성당의 벽화에서는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의 벽화를 통해서 교회 차원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지속하기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유대인 핍박에 대한 표면적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기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도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으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꾸지 않고는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을 들 수 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유대주의적으로 바꾸면서, 율법주의를 신율주의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따름의 대상으로,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구원론 등을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시도들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관점은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 11절을 묵상하며 살펴보고자한다.



창조주의 주권을 위한 언약공동체

 

예수를 죽였다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덴 공동체는 타락 이전의 공동체였지만, 타락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 공동체의 특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주어졌던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졌던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거하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단순한 소유권의 행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임함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한 조건적 축복으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렇게 위임을 받고 형성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며, 에덴은 최초의 언약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 후에 만들어진, 처음 언약 공동체였던 에덴의 재연이었다.

 

처음 에덴공동체에서의 아담이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산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된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언약공동체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분리를 전제로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거절을 당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에덴은 타락을 수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불순종한 아담에게는 거주가 허락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하지 못하였기에 거룩하신 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절을 당하셨던  곳이었으며, 거룩이 상실된 곳이었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이 땅에서 에덴은 상실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사람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에덴 성전은 순종이 요구되었던 곳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순종이 완성된 곳이다.



언약 백성의 대표성

 

에덴에서의 아담은 최초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의 역할은 순종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를 가져왔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유지,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온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온전하게 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공동체가 살아가는 자기 땅에 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인류의 범죄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민족의 범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죄성이 어떠한 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어둠은 알지 못했으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구약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는 포도원 지기들이 포도원 주인을 거부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이 유대인들만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유효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희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였으며, 예수의 죽으심으로만 처음 아담의 범죄에 대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처형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제한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정된 자의 구원은 대표성 안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은 정당한가?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변해준다.

 

에덴이 창조 세계를 대표하였듯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특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변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는 존재이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시키거나 차별화시켜서는 않된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여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자신들의 죄가 아닌 유대인들만의 죄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였고, 급기야는 홀로코스트라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교회는 유대인 박해의 주체가 되기도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오셨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죄악으로 돌아가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었고, 신자는 둘째 아담 안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의 표현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이스라엘이시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에 숨었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변한 것이었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 2020. 3. 5. 22:14

동거문화에 대한 신학적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헬조선이라는 한국의 상황은 젊은 이들의 혼인에 대한 관점마저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결혼을 앞둔 젊은 층에게 동거는 헬조선에서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 예식의 비용은 둘째치고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갖지 않을 바에는 꼭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에 들어가기 보다는 동거가 더욱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경제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거는 결혼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꼭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 법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국에 비하여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거 문화가 법적으로 보장되었고 이미 사회속에 하나의 제도로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나라들도 있다.

 

법적인 뒷받침이 없는 한국에서의 동거는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을 안고 가야하는 불편한 생활방식이겠지만  서구 사회의 동거는 이야기가 다르다.

 

동거 문화는 포스트모던 서구 사회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동거하는 가운데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법적인 보장과 국가로 받는 혜택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에 대한 것과 차이가 없기에 동거하는 당사자들에게 자녀는 더이상 동거 생활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거하는 당사자들은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법적인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식을 할 필요도 없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유지할 때는 이혼이 자유롭지 못한데 반하여 동거는 언제든지 당사자의 합의 하에 서로가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다.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이 합의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다.

 

동거문화의 보편성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편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이 원할 때 결혼식도 가능하며 법적으로도 등록이 가능하다.

 

결혼과 동거의 주된 차이는 경제문제와 서로에 대한 책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거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합의하에 동거에 필요한 재정을 일정 부분 분담하면 된다.

 

서로가 상대의 경제권에 대해서는 간섭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자신의 독립적인 시간을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즐길 수가 있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하여도 간섭할 수가 있는 권리가 없을 경우가 많다.

 

간음죄라는 개념도 없으며 외도를 한다고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이 동거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결혼은 상대방에 대하여 담당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에 대하여 재산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본다.

 

루터는 죄인으로서 필요한 외부로 부터의 “낯선 의”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혼인법에 비추어 “행복한 교환”(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성화, 균형있게 이해하기 p55)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 당시는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할 때 법적으로 신랑의 모든 소유가 신부의 소유가 되고 신부의 모든 소유가 신랑의 소유가 되었다고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결혼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러한 “행복한 교환”이라는 틀이 유지되고있다.

 

대신 동거 문화에서는 “행복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거 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수 없고 다만 필요에 의한 거래를 할 뿐이다.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가 신랑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혼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원적인 죄인이기에 죄인이 거룩하신 분과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서는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교환이 일어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내면의 근원적인 죄, 그리고 죄의 잔재들은 그리스도가 가지고 가셔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으로 해결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소유하게 되어 의인이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됨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혼인관계를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중 전가의 개념이 바로 혼인 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행복한 교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동거 문화는 결혼이 담고있는 귀한 성경적 원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결혼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문화가 동거 문화로 바뀌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변화가 있다.

 

포스트모던 신학 가운데 하나인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전가 개념을 배제하기에 “행복한 교환”이 배제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동거 문화와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혼인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새관점에서와 같은 요구와 조건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행복한 교환이 있어야한다.

 

전가 교리를 귀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전가 교리의 유비적 형태인 행복한 교환이 없는 동거 문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동거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결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하는 교회는 동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제대로 말 할 수 있어야한다.

 

동거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상은 필요에 종속된 욕심으로서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청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는 필요를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한다.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혼인 관계는 우리가 파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은 올바른 결혼 문화를 통하여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그리스도 2019. 1. 1. 10:44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선한 행동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보게되면 일종의 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7)”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의를 근거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이들이지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이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희생적 역할을 감당하려는 이들이다.


만약에 인간이 서로 희생적으로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 세상이 살기 좋은 유토피아적 낙원이 될 수 있다면,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약에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키면서, 가나안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세상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부강하고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당위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서 세상이 낙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살아있는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막고 다시 살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서 낙원을 기대한다거나, 죽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개념은 성립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미 죽어있는 세상이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는 자신이나 이 세상이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이 아무리 평화롭게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자이기에, 최종적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생명체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지니고있었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었던 생명이 상실되면서, 인간은 죄성을 가진 육신natural body이 된 것이다(창 6:3).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서로 낙원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가 없는 곳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한다.


인간은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극단적인 불행에 직면하지 않고는 좀처럼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대부분 환경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한 환경은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환경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불행과 죽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현실적 상황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인간의 당하는 불행과 죽음은 실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체로서의 인간의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이 없다면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을 깨달을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 불행과 죽음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인간은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될 것이다.


인간의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불행과 죽음의 근원과 실체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로서의 죽음을 외면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적 선행이 죽음의 실상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추구된다면, 선은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을 외면시키는 피상적인 수고들이 인간적으로는 선한 행위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를 수반하는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실상이 죽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바리세인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식적 행위가 거짓된 악한 행위임을 지적하신다.


이와는 달리 곤궁에 처한 자를 도움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을 유형적으로 나타내고자한다면,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긍정적인 것이다.


인간의 현상적인 행복과 불행은 항상 양면을 가지고있다.


인간의 육신이 풍족한 가운데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하지도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려고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행복한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되기는 쉽지가 않다.


반대로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사람이 당하는 심각한 고통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가운데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풍요로웠으면 출애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애굽에서 풍요가 계속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림받은 민족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에야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애굽이던, 가나안이던, 인간의 풍요와 안정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궤변의 양면은 육신이 된 인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육신의 풍요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 궤변은 이스라엘만의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도 적용이 되며, 죄성은 가진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에서의 직업적 성공이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모든 상황은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은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끔 인도하여야만 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자만이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무저갱에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무저갱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과 동일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기 전까지는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찾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세상의 불행한 상황과 죽음에 직면한 상황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을 위해서 불행을 방치하는 행동은 결코 옳지 않은 극단적인 행동방식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 세상을 행복하고 죽음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로 만들어가는데 전념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삶 가운데서의 불행과 고통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긍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기회로 삼아야한다.


불행한 현실이 구원의 특별 은혜로 인도되는 통로가 된다면, 불행한 현실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있다고 할 수 있다.


성도는 불행한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가운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없이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열어갈 수는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지니고있었다.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셨던 영적인 몸이 상실됨으로서 실질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타락한 인간은 실상은 죽은 자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에게 전하는 복음으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함으로 이미 영적으로 죽었으며, 동시에 생명력이 상실된 육신이 되었다.


육신에는 죽음의 개념이 담겨있다.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실상 죽은 몸으로 살아가고있지만,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죽고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표면적인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고있는 것이며, 그 안에 참 생명은 이미 상실된 죽은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내려가심은, 육신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며,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살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신 부활체를 통해서 유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오심은,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부활을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갖게 하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신 영적인 몸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입을 영적인 몸이다.


모든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적인 몸이 부활될 것을 약속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영적인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완성될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각종 통신 매체들은 온갖 사건과 사고의 소식을 전하고있지만, 이는 죽은 인간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산자로  살아가고있는 것은, 구속사의 큰 틀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그치는 그날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영원한 죽음, 즉 무저갱에 내려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죽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의감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해보려고하지만, 이러한 행동 방식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에 속하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이 극대화된다고해서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으로 세상이 완전하여진다면, 이러한 세계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자기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며, 이러한 나라에서는 사탄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놓인 세상을 다시 찾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인간이 선행을 근거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에 근거하지 않은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삶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킨다하더라도, 그곳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이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으며, 그곳에서의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던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셔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리 마시라고 항변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하신다.


베드로가 스승을 걱정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오히려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 방식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의 한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 고통과 역경이 필요하다면, 고통과 역경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생각과 행위들이 종종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사탄의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혈연 학연 지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3:51-53)”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인간적이고 서로를 위한다고 모인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종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일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하나가 되려고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오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이며,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모임은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세상에서의 모임이 종종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기도한다.


성도는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서 모이게되어있다.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 모인 인간은, 그 공동체의 특성 안에서 서로를 상대하여야한다.


공동체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23:57)”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분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성도의 역할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등으로 제약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회의 성도들이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으로 서로 얽혀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지역 사회의 교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다.


구성원들이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등으로 얽혀있는 교회에서 온전한 믿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은 인간 관계를 견고히 할 수는 있어도, 이들이 추구하는 인간적인 관계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바울은 율법을 가진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는 혈연, 학연, 지연의 극단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행위를 책망하고있다.


이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근거로한 율법주의와 자신들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한 민족적 우월주의에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평화는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그 소중함을 알 수가 있다.


평화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이다.


평화는 사람의 삶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이된다.


전쟁은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킨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바램이며,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전쟁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평적 평화는 수직적 평화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하늘과 땅의 분리를 견고하게하는 땅에서만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


성육신과 더불어 가족 구성원간에 분쟁을 일으키신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화평을 깨신 분이시다.


하지만 수직적인 관계가 단절된 수평적 관계는 생명이 없는 관계이기에, 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평화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하나님을 배제한 하나됨은 오히려 이 세상을 사탄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진멸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어린 아이는 물론 가축까지도 죽여야만 했다.


그들의 재물과 가축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용됨으로서 부정한 것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다,


수직적인 화평은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제한된다.


인간 세상의 수평적 화평에는 거룩이라는 조건이 없다.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는 실현될 수 없다.


진정 이 땅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된 관계 안에서 평화를 추구하여야하며, 이는 실상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제한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은혜가 배제된 일반은혜의 보편화는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일반은혜의 한계내에서의 평화는 특별은혜를 대체하는 평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검을 주러오신 것과 같이, 교회는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는 거룩할 수가 없다.


톰 라이트는 종교 개혁 이후의 유럽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종교 개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평화와 진리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여야 할 경우에는 진리를 선택하여야한다.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유럽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안에서의 평화를 추구했던 사회였기에,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변화는 전쟁을 수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족 간에 불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검을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하기 때문에, 진리를 선택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인간적으로 의학의 발전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만,  궁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유전자 가위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이지만, 그 사용 목적은 하나님과 진리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인간에게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들은 잘못된 성관계로 인하여 생기는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서 에이즈에 취약한 유전자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각종 GMO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자연법을 배제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국가들은 무기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것이라고 말하지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구축은 하나님을 배제한 악의 활성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첨단 기술들은, 각자 개인이 진리의 기준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을 더욱 견고히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있다.


표면적으로는 첨단 기술로 무장된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


인간의 죽음의 상태를 더욱 견고히 하는 첨단 과학 기술은,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또 한 가지의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결론


인간의 표면적인 선행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행위가 될 때, 이는 바울이 책망하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상으로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일반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특별 은혜로 귀결 되어야한다.


기복 신앙은 인간의 죽은 육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것이다.


육신을 위한 교회는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교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교회이다.


교회 공동체가 육신을 위한 공동체가 될 때, 그 교회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한때 유행하던 비지니스처치는 육신을 위한 교회였다.


요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늘어가지만, 교회 출석 교인들은 줄어들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는 수 없이 많지만 진정 나갈 곳이 없다고 한탄하는 현상은, 대다수의 교회가 육신의 소욕을 위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육신을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비록 인간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 관점에서의, 생명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단상 > 그리스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0) 2018.12.16
posted by Wonho Kim
:
단상/그리스도 2018. 12. 16. 21:52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자기 의를 근거로 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로 귀결된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된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 관계에 있는 적대적인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본능을 따라 행하게되어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간섲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행하고자하는 방식은 쉽고 어려움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기준이 된다.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인간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의를 성취하려던 유대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지라도 자기의를 성취하는 것이 육신의 소욕이었기에 이를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인간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가인이 얼굴을 붉힌 것과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스스로 의인이 되려는 자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다면, 영광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게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력화 될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승리를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의 속성에 담겨있었다.


아담의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의 기준이되며, 인간이 스스로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탐심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간 스스로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데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은 일종의 하나님과의 힘겨루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인간의 공로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붕괴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한다.


가인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히고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길을 선택하였다.


가인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서의 에녹성은 개벽, 즉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독립선언이었다.


가인의 독립 선언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구체적 표현으로서 아담의 범죄의 표상이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은혜의 자리에 초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 사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부인하면서, 이미 타락한 아담 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자신의 죄를 깨닫은 백성들에게 비로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을 상기시키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유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바벨론 포로와 같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가운데 부패한 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자유가 없는 노예의지로 본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행위 구원론적 사상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패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로 삼았다.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


개혁주의의 변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개혁주의에 속하여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려는 행동을 취하게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관점과 혼합시키면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는 행위를 하고있음을 본다.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신칼빈주의를 혼합시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같은 이들을 들수 있다.


성도는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려고하지말고,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마음과 입에 가까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취하여야할 것이다.



행위 구원론적 언약적 신율주의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였다는 언약적신율주의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언약적신율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시킨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시킨다는 개념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다.


언약적신율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며,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완성시키려고한다.


이들의 행위 구원론적 행태를 그리스도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리는 행태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도 아니며, 이들에게 아담의 타락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으며, 아담의 타락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암묵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가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삶의 본을 보여준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에, 언약적 신율주의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은 예수를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이 따라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이 땅의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예수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드는 작업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부분이 없지만, 예수를 따름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림으로서,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수 있는 부분이 된다.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예수를 따름으로서 쌓으려는 공로는, 예수를 모셔내려 그 위에 올라서려는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가 없다.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외적인 선은 이 세상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일 뿐,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은 끝까지 자신에게서 의를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인간의 바램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예수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오직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변혁운동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방법 가운데 또 한가지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문화를 창조명령에 근거한 인간의 창조 행위로 보고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이 보는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들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명령에 근거한 문화변혁을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상위 개념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은,  통치명령이나 지배명령으로서, 아담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했지만, 실패한 아담의 역할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중직이 회복되었으며, 창세기 1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완성시키심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을 주셨지만,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성취하여야할 과업으로 다시 규정하고있다.


이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또 하나의 유형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natural body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의 문화는 육신을 위한 문화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의 구조는 거룩하기에, 발전의 방향을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된 인간의 문화는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구조를 가지고있기에,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와 공유될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의 참된 신앙 생활은, 문화변혁운동보다는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인간의 기술 문명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동은 비단 기독교라는 옷을 입은 이들만의 행동 양식이 아니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으며, 기술 문명은 끝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도화된다.


인간의 욕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심이 내면에 깔려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화려한 문명 기술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기에, 아무리 발전된 문명이라도 타락한 육신의 완성을 위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원시 사회에 비유를 하면서, 발전된 문명의 극치를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이다.


에덴은 원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하늘upper register과 교통이 가능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구현되었던 곳으로서, 타락하여 육신 안에 갇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문명의 발전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계시키려는 행위는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기만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이다.



자연법 앞에서 선 인간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려고했지만, 율법 앞에서 정죄받고 파멸과 심판 앞에 서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선 인간들은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의 의로움을 추구하며,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 승리를 외치려고하지만, 인간 사회의 종국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문명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고하지만, 그 종국은 하늘에서 추락한 사단과 같이 추락될 것이다.


추락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 놓여졌던 것과 같이, 추락한 현대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던지, 바깥에 있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마음과 입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들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단상 > 그리스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  (0) 2019.01.01
posted by Wonho Kim
: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12. 2. 18:56

인간의 행악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행악들이 이미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자유로우실 수가 없으실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들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불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이러한 인간적 이해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삼위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이라는 관점에서, 짧게나마 생각해보고자한다.



흔한 오해와 질문들


흔히들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이 말 가운데는 모든 인간의 불행한 상황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 내포되어있다.


또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면, 나의 어떠한 행동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신 것인가?”라는 의문을 낳게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하여 “내일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며,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반발하기도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게되며,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간에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운명론적이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수도 있다.


어떤 신자들은, 걱정과 근심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안식에 거한다고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기도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한 이들, 특히 칼빈주의에 속하여있다는 장로교인들의 행동 방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같은 이해부족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어야할 사항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유의지적 인격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자신들의 악한 행동까지도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오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아담의 범죄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는가?


만약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악을 행하는 이들의 악행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악행을 예정하셨다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운명론적 사고 방식은 아담의 범죄와 동시에 생긴 죄성으로 말미암은 생각이다.


아담은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이 주셔서 자기와 함께하게하신 여자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선악과를 먹게되었다고, 간접적으로 여자를 자기에게 함께하게하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린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자하는 행동 방식은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 방식이다.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도 아니시며, 아담의 선악과 범죄를 조장하신 분도 아니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선악과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에서 기인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책임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온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이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서,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훼속시키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있다.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모든 인간에 대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방관하신 책임이 없으신가?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면 음주 운전을 한 사람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음주 운전자 옆에서 음주 운전을 방관한 동승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를 보시고 범죄를 막으실 수도 있었는데, 왜 범죄를 막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마치 숨어서 교통 위반하는 차량을 기다렸다가 적발하는 순경과 같이,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범죄를 하기까지 숨어서 기다리셨다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나타나셔서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신 것인가?


그렇지 않으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려할 때에 이를 막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다.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persona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persona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이었다.


하나님의 생기가 불려 넣어진 인간은,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spiritual body였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natural body이 됨으로서, 인간 안에 넣어진 하나님의 인격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육신natural body이 되었다(창 6:3)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비록 육체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영적인 인격적 존재였으며, 어린 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존재도 아니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인간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시지 않기에,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타락한 인간은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과 더불어 지내는 것에 오히려 평안을 느끼는 왜곡된 존재이다.


인간이 왜곡된 모습에 익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의지의 상실로 인한 것이다.


처음 아담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체였기에,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적 속성을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 가운데 한 가지는 자유 의지와 서로의 의사 결정에 대한 존중이다.


만약에 인간이 가지고있는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 가운데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없이 상하 관계로 형성된 강압적인 행동 방식이 있다면, 인간은 온전한 인격체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강압적인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하였을 때, 자신들이 결정한 행동 방식이 인격적으로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반대하고 막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진정한 인격체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에, 부모가 생각하는 미성숙한 자녀에 대한 간섭과 보호의 개념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아담과 하와는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로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성숙되어진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인격체로서 지음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모든 행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자신들 스스로가 결정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스스로의 인격적 결정에 의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실상 사단의 종이 됨으로서, 인격체로서 가지고있던 자유 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사단에게 종 노릇하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있으며,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지 못함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인격적 자유 의지의 상실과 더불어 사단에 종속되어 노예 의지를 가지게 된 타락한 인간의 행동 방식은, 스스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죽음에 이르는 악을 창출할 뿐이다.



악에 대하여 무책임한 운명론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있던 인격적 자유 의지가 붕괴된 인간은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모든 행함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고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인간은 이미 선을 행할 지혜와 능력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손상된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 방식에 대하여 더 이상 책임을 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의 필수 구성 요소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의 운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책임있는 능동적 태도를 취하려고하지 않게 만든다.


심지어 섬범죄자가된 목회자조차도 자신의 범죄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옥의 티 정도로 여기면서,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있기에 어쩔 수 없다면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도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타락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유 의지를 회복하는 책임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성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한다.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모르는 행동 방식은, 자신에게 참된 자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자신은 종의 의지, 즉 노예 의지에 묶여있는 존재이며,이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또 다른 범죄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여 거룩에 참여된 성도라면, 죄에 대하여 극히 예민하여야한다.


거룩은 죄로부터의 분리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더불어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성도의 죄는 반드시 회개의 기도가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인격적 관계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은 성도의 회복된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악행이라는 적극적 죄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에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는 일에 참여되기에, 항상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려야한다.


성도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어야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성도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운명론적인 예정이라는 개념을 적용시켜서, 죄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면 안된다.


성도의 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가운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나타내야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다시 함께하는 것이며, 처음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유 의지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를 향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성도 안에서 회복되는  인격적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로봇과 같이 기계적으로 성도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인도하셨고, 야곱을 간섭하셨던 것과 같이, 인격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성도의 길을 인도하심으로서,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 들어오도록 하신다.


성도가 걷는 성화의 과정은, 스스로 시행 착오를 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되어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적 회복의 과정이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과 간섭하심은, 성도의 인격이 존중되어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간섭하심이다.



일반은혜와 인간의 죄악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비할 수 있도록 하셨고, 가룟인 유대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가서 예수를 팔도록 허락하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과 악행의 주체는 구분되어야한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마땅히 영원한 멸망 가운데 죽어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자 모든 인간의 죄를 억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하는 일반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시는 일반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셨다고 악행을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축복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 가운데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인간의 불행과 악행은 철저하게 타락하여 사단의 종노릇하는 인간과 사단의 합작품일 뿐이다.


인간의 악행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아담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악행을 행하려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있을 뿐이며, 하나님은 이를 억제하시며 은혜를 베푸실 뿐이다.



삶 가운데의 불행한 일들


성도라고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불행에서 자유할 수는 없다.


성도의 불행은 성도 자신의 잘못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범죄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있다.


제초제를 과도하게 사용한 농산물을 먹고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정죄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중국에서 날아온 비세먼지로 인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은 억울한 마음뿐일 것이다.


GMO농산물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가축은 대부분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GMO농산물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항생제와 살충제에 노출되면서 사육되어질 수 밖에 없기에,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축산물을 피할 수는 없다.


문명의 혜택 못지 않게 많은 미세먼지와 소음공해와 빛공해, 그리고 높은 주거비등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고있으며, 이로인한 스트레스와 질병은 성도라고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성도라는 이유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과 지진과 쓰나미의 재앙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신으로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삶 가운데 끊임없는 불행에 노출될 수 밖에 없지만, 이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아담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결정된 것이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아담이 선택한 하나님을 떠난 삶의 후유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하여야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불행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은혜를 은혜로 인식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어버려둠으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때,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서야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스스로의 풍요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불행이 없이는, 하나님없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육신의 풍요를 누리는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원적인 은혜를 누리는 과정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과 자연법은 죄를 고발하면서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과 자연법은 타락한 인간 사회의 극단적인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도구가 되며, 인간의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를 깨달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고통이 있었기에 가나안을 향한 여정이 시작될 수 있었다.


택한 자가 그리스도께 인도되기 위해서는 삶에서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자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안락에 취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인간의 악행 한 가운데서 예정하심과 섭리로 모든 상황을 간섭하신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침묵하시고, 택한 자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도록 내어버려두시는 시간들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시간은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간섭하시는 시간들이다.


인간이 불행 가운데 있는 시간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파멸의 시간이지만, 구원받을 자에게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는 희망의 시간들이다.


죄인으로서 죄를 짓는 행위는, 사단의 종으로서 짓는 행위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행들 한 가운데에서도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보편적인 악을 제어하고 통제하신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겼지만, 가룟유다의 행동이 하나님의 예정과 간섭을 결과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완고하고 악해질 수 밖에 없기에, 인간의 완고함과 악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완전한 어둠은 빛의 소멸이기에, 은혜의 빛을 거두어가신다고 하나님께서 어둠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둠 가운데있는 인간의 악행까지도 사용하셔서 구원받을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는 빛이 당연히 비추어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보편적인 일반은혜를 베푸심으로, 인간 사회에 어느 정도의 선을 유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은혜는 당연한 것도 아니며,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인간의 악행을 합력하여 선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악행이나 불행과 더불어 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룟유다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셨고, 그 소욕대로 행하게  내어버려두셨으며, 이를 아시고 사용하셨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불행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런 불행이 일어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부정하기도하지만, 이는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어나가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힘들기도하지만,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존재이기에, 삶에서의 불행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타락한 인간에게 불행이 없다면, 이러한 세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으신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시기보다는, 이를 사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행을 조장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인간들을 죄악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불행들에 내어버려두심으로서,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자로 내어버려두시고, 택한 자는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불행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과 불행을 미리 사전에 간섭하셔서 차단하신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가정해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과 모든 축복을  경험하고도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간섭을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고해더라도,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위로부터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면, 아래로부터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불행 가운데 내어버려진 인간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불행을 겪고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옴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불행한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렇다고 불행과 악이 사용되어진다고, 하나님께서 악의 주체가 되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길을 갈뿐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내어버려두심으로,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어떠한 악이라도, 이를 사용하셔서 택한 자에게 선을 이루어가시지만, 하나님이 행동의 주체가 되시는 예정은 악의 주체와 분리되어 해석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셔서 인간의 악행을 막으신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상실하게되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간만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선택한 악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를 구원의 기회로 사용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원망하는 이들의 소원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막아주신다면 세상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자문해본다.


통증의 경고등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몸의 잘못되어가는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을 것이며, 결국 몸은 망가져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의 행악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교만은 극에 달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또 다른 형태로 파국을 맞이 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해도 불행이 발생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동 방식은 무책임하고 통제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행들은, 악을 제어하는 기능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해주는 필요악이다.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삼위 하나님의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격체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존중을 받아야만 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는 자신의 행동의 결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선악과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결정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언약이라는 형태로 아담에게 주어졌기에, 아담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언약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언약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기반으로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로 결정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 스스로의 인격적 결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악과 언약이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겠다는 독립 선언이었으며, 반역이었다.


아담은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자유 의지,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결정하는 인격적인 자유 의지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가 최종적인 결정의 주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담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더불어 인격적 자유 의지는 상실되었다.


인간의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배제하는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서로를 존중해주고 서로와 대립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 범죄는 자신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근거로한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이러한 자유 의지는 하나님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기로 한 사단의 반역을 이어받는데 사용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자신이 최종적 결정의 주체가 되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하여 왕으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려야했지만, 반역한 아담은 오히여 피조세계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이는 오직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 관계가 형성이 될 때 완전하여지는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새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타락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어진 결과를 가져왔다.


타락한 인간에 남아있는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제대로 투영될 수가 없으며, 이로 인하여 스스로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의지와 능력이 상실되어버렸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는 악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악행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도 아니며, 자신도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왔으며,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좀비와 같이, 악의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이 행하는 온갖 악행도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문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운명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마땅히 이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사용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악의 통로로 사용되고있는 불행한 상황은 결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정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새언약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예정이라는 용어에 담겨있는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행하는 악의 주체는 사단이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한 행동을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자신의 섭리 가운데 이러한 악마저도 사용하셔서, 창세 전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뿐이다.



구원과 유기의 이중 예정


칼빈은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에 대한 이중 예정을 말하고있다.


구원을 예정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시면서, 구원받을 자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되도록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고 유기될 자를 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악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죽기로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의 악행은 하나님께서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자를 내어버려두신 결과일 뿐이다.


선행과 악행은 인간의 구원과 유기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들이기에, 이들은 선행과 악행 이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지만, 이들이 은혜 가운데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행하는 선이 구원을 이루는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악한 이들에게도 임하는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악을 어느 정도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다.


유기될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유기되는 것일 뿐이지, 하나임께서 그들의 악을 예정하고,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조장하시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과 행위


구원과 유기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구원과 유기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적용되어야하는 것이다.


선행과 악행이라는 행위는 구원과 유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예정의 중심은 선행과 악행이라는 행위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이기에, 알미나안들의 주장과 같이, 그들이 악을 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알미니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는 이들이 선을 행할 것을 아시고 구원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근본적 오해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과 연결시키면서 생기게되는 것이다.


유기에 대한 예정은 인간의 행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예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악한 자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심은, 그들에게서 일반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일어나는 결과적인 현상일 뿐이지, 이들의 행악을 하나님께서 조장하시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된 인간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다.(창 6:3)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영적인 속성을 담고있었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다함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상의 세계와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인간이 사는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천상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과 분리된 타락한 육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 즉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땅과 하늘의 연합은 이 땅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분리된 하늘과 땅은, 거룩과의 단절이었으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 속하여있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천상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하나임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지만,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않을 뿐더러,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습은 선택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힘들게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가,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모양만 있을 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빈껍질일 뿐이다.


거룩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거룩한 하늘과 분리된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한 육신이 된 인간의 악행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여지가 없기에, 이들의 악행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악한 변명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라도, 이들의 악한 행동 마저도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실 뿐이다.



상실된 자유의지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개념은, 인간의 노예 의지, 혹은 종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특히나 인간의 행위를 구원과 연결시키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루터의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하여 많은 반발을 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을 아담과 연계시키지도 않으며,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도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 안에서 상실된 자유 의지의 회복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자유 의지가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타락 이전에는 인간에게 담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았다.


책임있는 행동은 존중되어져야만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행동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예정에 의하여 행해지는 행동은 진정한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락으로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이 존중되어질 수도 없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기에,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않으며, 내면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도 형태만 남아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격적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는 육의 소욕만을 쫓아가는 본능적 의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육의 소욕을 쫓아서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의지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를 노예의지, 혹은 종의 의지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하려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마13:34)


인간적으로는 유대인들만큼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이들의 행함마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행동일 뿐이다.


독사의 새끼들이 행하는 악은 결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구원을 이루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실 뿐이다.


가룟 유다의 악행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의인이 되어야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 즉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 행한 것이었고, 사단에게 쓰임을 받았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딘의 종노릇하는 가룟 유다를 사용하심으로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이 땅에서 행하신 것이다.


가룟 유다는 악한 행동을 하여서 심판받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악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구원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가 없었기에, 최고의 기회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육신의 소욕을 좇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최고의 기회를 최악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죄성에 의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찾은 인간


성도가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성도와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갈2:20),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이 되었다.


아담 안에서 육신인 된 상황이 변하여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의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치게되어있다.


성도의 내면에서의 인격적 회복은, 마치 재활 치료와 같이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일종의 성화의 과정인 것이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며, 성화의 과정은 성도의 인격이 무시되지는 않는 범위에서 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는 참 자유를 얻게되며, 참 자유 안에 거하는 성도는 자유 의지를 소유하게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성도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인격적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완성시켜 나아가지만, 인격과 자유를 연계시켜 생각해볼 때, 성도의 인격적 행동이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정은, 아직도 육신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개별 행동에 관한 것보다는 구원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성도 안에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예정은,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성도의 행함을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만 해석한다면, 진리 안에 있는 성도에게 참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예정은,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한 삼위 하나님의 종합적인 사역에 의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 때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 의지에 의한 삼위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을 이루게 될 것이다.


'단상 > 하나님의 형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0) 2018.10.27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  (0) 2018.02.01
posted by Wonho Kim
: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10. 27. 19:40

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야만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부 가운데 한쪽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최초의 부자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최초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으며, 창세 이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선택한 인류 최초의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할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인물이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비록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었지만,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하심으로, 천상의 세계가 인간과 함께 공존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한 인격적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었다.


인격적 존재의 자유로운 선택은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면, 아담의 인격적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되며,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아담의 범죄가 예정된 것이었다면, 아담의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이 뒤따르게되며, 아담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선악과 범죄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시기에,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인격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행위이며,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과 같은, 일종의 반역 행위인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마땅히 창조 세계의 기준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세계의 운행 원리가 되어야만 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인 인간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진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반역행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단순한 헤어짐이나 분리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집을 나간다면, 부모의 심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이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최초의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이별을 통보한 것이며, 이별을 통보받은 하나님의 마음의 찢어짐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고통을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별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무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인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추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추락한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은 단순한 연민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상실이 수반된 고통이다.


사람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신 이별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가 없다.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이별의 고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은, 이미 아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고통의 표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 세계의 실패를 그냥 수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적인 능력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격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덮으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모든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주시고, 다시는 사망으로 인한 헤어짐이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심은, 이별의 고통을 참으실 수가 없으셔서, 나락으로 추락한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택함받은 자의 눈물을 씻기우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희생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삶 가운데 겪는 모든 이별의 고통과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과 부활하심은,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해입히셨듯이, 이별은 사람이 먼저 선택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피해자이셨지만, 하나님은 정죄하시기에 앞서서, 벌거벗은 인간을 사랑으로 덧입히신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의 근원에는 아담의 범죄가 자리잡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 해결을 맛볼 수 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소망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마치 집을 떠난 자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부모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다양한 이별에 대한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아들의 위치를 방각하고 이미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먼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위치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범죄는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였으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상처를 받으신 분이시다.


삶 가운데 서로를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께 준 상처를 재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밖에 없다.


자녀를 키우면서 겪게되는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아담 안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 할 능력이 없다.


그나마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그러진 일부분일 뿐이다.


자녀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고통은, 원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져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상실되어가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모든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부활 2018. 2. 3. 00:48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 대한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성경에는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비슷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온다.


종종 비슷한 가사가 들어간 찬양을 부르면서도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문맥과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교리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명해주는 다음의 글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있다.


니케아 교회회의(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381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다. 또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을 갖고 계신다”고 진술했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조엘 비키 마크 존스, 399에서 인용)


이는 창세 전의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낳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낳았다”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계시켜주는 성경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5)


낳았다는 말씀의 의미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규명해주는 말씀이다.


낳기 위해서는 산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산고의 과정은 오랜 고통의 시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기까지의 수고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가나안에서의 고통의 세월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간이라는 오랜 산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산고의 고통은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마감이 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죽으시기까지 고통을 감당하신 것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낳으심


오늘 너를 낳았다는 것은 완료형을 뜻한다.


부활은 약속의 성취로서 이미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약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산고의 열매로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들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도 아들이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낳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낳으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썩어짐과 죽음에 대한 영원한 결별로서 이들에 대한 영원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들이신 그리스도


로마서에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심으로서 첫 째 아담의 잃어 버린 자리를 채우셨다.


누가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아들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셨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삼위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신의 형상을 회복시키신 것이며, 삼위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녀 삼으심으로,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자녀를 되찾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은, 아들 안에 연합된 모든 성도들을 자녀 삼으셨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유대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유대 이스라엘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으며,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들이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시며, 예수의 부활하심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이스라엘이 되셔서 자신의 몸된 지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모으신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새 이스라엘의 탄생도 없었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소속될 나라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백성들의 탄생의 의미하며, 새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짐을 의미

한다.



맏형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맏형으로서 성도를 대표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아들은, 성도들을 부활을 통하여 자녀 삼으실 것에 대한 보증이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새 이스라엘의 백성의 백성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의 백성과 구별된다.


유대 이스라엘 백성은 본질적으로 죄인인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인 유대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시지 않으시고,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새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성도는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ㅣ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들로 낳으신 분이시다.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간추려 살펴본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새창조 사역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아들을 삼으셨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자녀의 상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산고의 고톤 가운데 낳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문을 여신 것이다.


성도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낳으신 아들의 자격에 참여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기까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산의 고통을 담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단상 > 부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부활과 안식  (0) 2018.01.03
posted by Wonho Kim
:
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2. 1. 17:41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재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규정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간에 인격적 관계가 요구되는 가운데 사회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과의 긴장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인격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 안에 담겨있는 인격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인격체persona로서는 세 분이시지만 본질substantia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 분 하나님의 공동체적 인격이 내포되어있다.


세분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세 분을 하나의 본질로 연합하여 일체를 형성한다.


인간의 인격을 통한 공동체적 관계성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통한 연합체를 결성한다.


인간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져있는 인격의 표현에서 나온 것이며, 이상적인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구현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아담의 범죄와 손상된 인격


아담의 불순종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파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조물로서의 아담 안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규명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공동체적 관계성을 유지해주었지만, 불순종에 의한 관계성의 파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손상을 가져왔다.


삼위 하나님의 서로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피조물인 아담에게는 순종으로 요구되었으며,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방법이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되는 법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관계성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상실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관계성의 파괴는 인간이 지니고있던 인격의 손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존중해주는 인격의 손상을 가져왔다.


인간 안에 담겨있던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손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으로 존중받던 인간이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단의 종으로 바뀌었다.


자녀와 종의 차이는 인격이 유지 되는 관계냐 아니면 상실 된 관계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사단의 종이되었기에 그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삼위 하나님의 위격이 존중받듯이, 존중을 받을 수는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하고자 할 때 즉시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아담과 이브는 존중받는 인격체였기에 선택에 대해서도 존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타락 이후의 비인격적 사건들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역사는 인격이 상실된 인간들이 어떠한지를 고발하는 역사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해서 살겠다는 표시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개벽이라는 뜻의 에녹성을 쌓고서 아들의 이름도 에녹이라고 지었다.


인간 스스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관계성의 파괴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도시 문명이 발달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들은, 모든 신들의 출발지로서, 우상 숭배와 더불어 시작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유래된 각종 신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타락한 인간을 더욱 더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래된 신들로 만연한 가나안의 우상들과의 싸움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체와 가나안의 비인격체와의 싸움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격적으로 대하셨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 안에서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이 얼마나 비인격적이 되었는지를 고발하는 역사였다.



비인격적인 현대 도시 문화


최초의 도시는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이었으며, 도시의 성격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도시에서는 도시의 특성상 서로에게서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도시가, 자연을 의지하는 농촌과는 달리, 경제 원리로 운영되기에, 도시 구성원은 서로에 대한 필요 관계로 구성될 수 밖에 없다.


현대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상이 돈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현대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확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도시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도시의 보편화는 그나마 인간 안에 남아있던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더욱 비인격적으로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는 것은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일그러진 형상이 더욱 일그러져 사랑을 주고 받을 만한 인격적 요소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담 안에서 비인격적 존재이로 남아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마치 수술 받은 환자가 재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이, 성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나아간다.


성도 안에서의 인격의 회복은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도를 통한 인격의 회복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표현 방법이다.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인격체로서의 권리이다.


자신을 표현하며, 표현된 내용이 존중을 받을 때 비로서 진정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존중받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성숙된 기도는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교회 공동체와 인격의 회복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 공동체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체로서 구현되는 곳이다.


설교와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존중받는 인격체로서의 활동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인격체의 성장을 위해서 성화라는 성장 과정이 요구된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인격체의 성장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았기에, 신앙생활은 회복된 인격체로서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가 사회에서도 모든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만 한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의 인격적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부활 2018. 1. 3. 12:38

그리스도의 부활과 안식



Paul Kim (penthos7@naver.com)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처음 아담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되어질 때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처음 아담과의 관계에서 해석되어질 때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진 에덴에서의 과제의 성취의 결과물이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에서의 요구는 한시적이었다.


이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요구가  한시적으로 재연된 것과 유사하다.


만약에 아담이 통치 명령 (창 1:28)과 선악과 금령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행하였다면 아담에게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실패하였다고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에덴에서의 목적인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취하셨던 안식이 이 땅에서 표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땅에서의 안식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나타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한다.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안식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오실 그리스도에 의한 안식을 예표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로서, 성취하신 안식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한 주권을 표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사역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 의하여 예표되었던 안식을 성취하시는 사역이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 성취되어야했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원래 에덴에서 목표하였던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에 대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후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은 이 땅에서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이다.


상실된 자들, 포로가 된 자들에 대한 해방을 선포하는 날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상실된 자이며, 사단에 포로가 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에게만 적용이 된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땅에서 성취된 안식을 근거로 이 땅에 희년을 선포하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인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으며, 밀 수확의 첫 열매를 드리는 칠칠절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 땅에 영원한 안식이 선포된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언약, 즉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이 이 땅에서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이 땅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이 땅에 안식을 선포하는 창조 사역이다.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으로서의 구원은 더 이상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의 행위의 요구는 이 땅에 임한 영원한 안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성령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는 참 이스라엘로서 역사적 이스라엘과는 구분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지만, 역사적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다.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부활하심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사도들에 의하여 새롭게 시작되어진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이다.


율법에서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인 그리스도의 안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부활을 통하여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가 있으셨다.


부활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느것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이 표현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안식의 성취로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이들이 생명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신자는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목적을 성취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요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부활로서 안식을 성취하셨다.


신자는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문화 명령)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대위임령)을 수행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야한다.


하나님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문화변혁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자에게 주일은 일주일의 시작이기에 일상이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이루어져야함을 인식하여야한다.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단상 > 부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 대한 단상  (0) 2018.02.03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