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26. 5. 30. 07:58

주식투자와 신앙생활


=======(들어가는 말)

현대인에게 주식투자는 일상생활의 한부분이 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있다.

투자의 방식은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특히 기술을 기반으로하는 산업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급격하게 성장하게되었다.

현대 사회는 기술 사회인만큼 투자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주식 시장은 모든 이들에게 투자에 참여할 수 있을 길을 열어준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식투자는 외면할 수 없는 분야가 되었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식 투자에 대하여 신앙적인 관점, 특히 주식 투자가 미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하여 한번쯤은 심각하게 고민하여야할 것이다.

투자라는 것은 경제 원리에만 국한 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데 자신의 삶의 모두를 드렸지만 이 땅에서 받은 결과물은 참수를 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자신을 온전히 바쳤지만 그로인하여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원한 축복을 위한 엄청난 투자를 하였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좀처럼 마음에 와닿지가 않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투자는 물질적 수익을 위한 것이며 자기 희생은 손해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결국 투자라는 개념은 영원을 위한 신앙과 현재의 물질적 축복을 위한 욕심간에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개념이다.


====(투자와 도박)

도박이라는 용어와 달리 투자라는 용어에는 긍정적이고 건실한 느낌이 담겨있다

진정한 투자는 신뢰를 바탕으로 그 결실을 보기까지 오랜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담아 두게 된다.

하지만 불신이 개입되는 순간 더 이상 투자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확실성이 감소될 때는 투자가 도박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된다.

도박은 일종의 확률 게임이다.

투자가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도박에 가까운 성격으로 바뀌게된다.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바로 투자를 철회하게된다.

주식 투자의 현실을 보면 젊은 투자자일수록 평균 주식보유 기간이 짧아지며 특히 20대 이하의 평균 주식보유기간이 불과 5~6일 내외라는 통계를 보여주고있다.

주식보유 기간이 짧다는 것은 투자 개념보다는 도박의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사고 팔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여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식투자의 중독성)

적은 액수의 투자는 손실이 발생한다고하더라도 마음이 비교적 가볍지만 적은 투자 만큼이나 적은 이익이 발생하므로 주식 시장이 과열되는 상황에서 적은 액수를 고집 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적은 액수라고 주식을 매입한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액수가 커지게 마련이고 많은 이익을 보았을 때에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좀 더 과감한 투자를 하게된다.

그러다보면 빚을 내서 투자를 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기 자산의 상당한 부분을 투자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일단 투자의 비중이 높아지면 온 마음이 주식 상황에 몰입될 수밖에 없고 주식 시장의 상황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이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되기에 일상을 주식 시장의 상황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어 그 날의 시황에 따라 감정이 요동친다.

매일 경험하는 천국과 지옥의 감정은 자신의 일상에 고착화되면서 매일같이 스릴을 맛보는 삶의 리듬이 되어버린다.

정보를 접하지 못하면 다가오는 불안감으로 인해서 스마트폰을 손에서 땔 수가 없게된다.

이는 전형적인 알콜 중독이나 스마트폰 중독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주식 시장에 투자를 하는 것은 조그마한 호기심이나 욕심에서 출발하지만 결과는 헤어나기 힘든 중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식 시장의 속성)

그러면 주식투자가 나쁜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주식은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경제원리이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주식시장이 없이는 기업이 자금조달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스타트업 기업들에게 투자는 절대적인으로 필요하다.

만약에 투자가 없다면 그 사회의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다.

주식투자는 부동산 시장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부동산 시장도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는 주식투자와 같이 단기간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중독성을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식투자는 단기간에 사고 파는 행위를 할 수 있기에 부동산 투자와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남다른 정보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부를 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투자에는 정직보다는 트릭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건전성보다는 권력 유착형의 행태가 자행됨으로서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주식 시장의 상황은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내부 정보력을 이용하거나 언론인들과 결탁하여 시세를 조작함으로서 건전한 투자자들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투자라는 자체가 위험성을 내포하고있으며 스포츠경기와 마찬가지로 서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주식 시장의 현실)

젊은 개미들의 공격적인 매매방식 뿐만이 아니라 기관투자자들과 외국인 투자자들의 공매도를 비롯한 다양한 투자 형태는 전적으로 이익을 위한 매매방식이다.

기관과 외국인이 전문 인력들의 정보력과 고도화된 분석을 통하여 공격적으로 매매를 하는 상황에서 개인이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투자방식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식 투자는 정보력과 타이밍에 달려있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를 최대한 빨리 취득해야하며 이를 분석하고서 언제 사고 팔지를 결정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한다.

그래도 정보력에 앞서가는 기관과 외국인의 판단을 넘어서는 판단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많은 개미투자자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외국의 뉴스를 취합하면서 그날의 매매를 어떠한 방향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들과 경쟁하여야할 신앙인이 아침 일찍 일어나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있나)

성경은 부하고자하는 자에게 여러가지 경고를 하고있다.

잠언 28장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있다.

형벌은 범죄에 대한 것이기에 속히 부하고자하는 것은 범죄에 속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어느 정도 속히 부하고자하는 욕심이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있다.

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인간이 스스로 취하려고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는 육신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어느 마라톤을 오랫동안 해온 정형외과의사의 말이 명언으로 다가온다.

기록은 노력의 결과로 따라오는것이지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록을 쫓아가다 보면 몸이 부상을 입고 고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땀흘리고 수고하면 그에 맞는 결과로 소득이 따라오는 것이다.

부를 얻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키면 결국 몸이 병들게되고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육신이 경제에 묶일 때 삶의 주체는 육신이 아니라 경제가 되어버린다.

잠언 30장의 아굴의 기도에서는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라고 한 것은 물질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식 투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이는 마치 술은 마셔도 취하지 않는 범위에서 마셔야한다는 말 만큼이나 어려운 말이다.

주식투자는 마치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이 스릴은 있지만 내리고 싶어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미 폭망하고서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주식 투자는 흥해도 비극이고 망해도 비극이다.

주식으로 쉽게 돈을 벌면 쉽게 없어진다.

이는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결과가 안좋은 것과 매 한가지이다.

잠언 20장 21절에서는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기록하고있다.

잠언 13장 11절에서는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동을 통한 수익의 창출은 단순한 수입을 넘어서는 귀한 의미들이 담겨있다.

노동은 수익 창출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으며 이는 삶의 의미로 이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으로도 이어진다.

주식을 통한 수익 창출은 노동의 깊은 의미를 상실시키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과 더불어 삶의 의미를 상실시켜버린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마약을 통한 쾌락에 중독되어서 일상의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투자하는 것을 제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이 투자할 때는 주식시장의 여러 부정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접근해야한다.

개인은 경기에서 그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고 모든 위험을 혼자서 감당해야한다.

이러한 위험요소 때문에 개인은 좀 더 안전한 안정적 투자를 위해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기관에 의탁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주식시장과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위험 요소들이 존재한다.

투자라는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크신 진노는 인간의 육신 됨에 있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육신이 된 존재였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심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을 하였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육체가 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창6:1~3).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자들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생활을 하였을 것인데, 그들이 사람의 딸들,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도 않는 이들의 육신적 아름다움에 매몰되어 그들과 함께 함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의 결과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게되고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주식의 속성이 사람의 딸들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끌리는 마음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 육신이 된 인간들을 묶어놓는 매력이라면 주식투자의 장밋빛 환상은 재물을 쫒는 인간들을 묶어놓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가장 우선 순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가운데 마귀는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시험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식으로 버는 돈은 마치 돌이 떡덩이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이러한 횡재를 얻기 위한 몸과 마음의 쏟아부음은 사람으로하여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만든다.

성도에게 주식 투자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수익과 손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없게 만든다.

마음이 주식 시장에 가있는데 눈으로 읽는 성경이 마음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이다.

주식 투자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 투자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현재의 주식 시장의 속성을 고려해볼 때 주식 투자는 성도의 신앙 생활에 치명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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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1. 10. 13. 20:17

요한복음 1장 11절에 비춰본 톰 라이트의 거짓말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들

 

새관점주의자들은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항하는 행동 방식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3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로마와 타협하고 아부하며 빌어붙어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다.

 

두 번째는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숨어사는 도피자들이다.

 

세번째는 로마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열혈주의자들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세가지 유형이 전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대변해준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할지, 희생적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은 로마였으며,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 당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예수는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를 자기 백성, 즉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2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있다.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이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

 

행위가 요구되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며, 새관점의 예수는 안식의 주인이 아니며,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왜곡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를 유대교 친화적으로 바꿈으로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새관점과 홀로코스트

 

예수를 로마인이 죽였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결코 현대 유대인들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새관점은 유대주의적인 노력이 많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http://www.reformanda.co.kr/theoJournal/98428)

 

새관점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있어왔던 여러 자유주의학자들의 주장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적 관점들과 성경신학적 관점들이 성경 자체를 근거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새관점은 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한 1세기 제2성전 유대교”, “슈바이처의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라는 3가지가 주된 틀로 구성되어있다.

 

새관점의 출현의 배경에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 있다.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의 예수에 대한 해석을 취합하여 새로운 의를 산출해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새관점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복음을 유대교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최소화시킨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삼위일체적 예수라고 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 된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려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있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을 강조하며, 신약의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실 때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다.

 

어둠과 빛, 주검과 생명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이시며, 연장과 확장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가 없는 단절된 반대의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표면적인 개념이다.

 

이면적으로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만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만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 주장들은 기독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거짓된 결과물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 2021. 10. 13. 20:13

요한복음 1장 11절을 통해본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오류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정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 실은 잘못된 관점인 것이다.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명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성당의 벽화에서는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의 벽화를 통해서 교회 차원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지속하기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유대인 핍박에 대한 표면적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기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도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으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꾸지 않고는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을 들 수 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유대주의적으로 바꾸면서, 율법주의를 신율주의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따름의 대상으로,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구원론 등을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시도들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관점은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 11절을 묵상하며 살펴보고자한다.



창조주의 주권을 위한 언약공동체

 

예수를 죽였다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덴 공동체는 타락 이전의 공동체였지만, 타락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 공동체의 특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주어졌던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졌던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거하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단순한 소유권의 행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임함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한 조건적 축복으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렇게 위임을 받고 형성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며, 에덴은 최초의 언약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 후에 만들어진, 처음 언약 공동체였던 에덴의 재연이었다.

 

처음 에덴공동체에서의 아담이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산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된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언약공동체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분리를 전제로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거절을 당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에덴은 타락을 수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불순종한 아담에게는 거주가 허락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하지 못하였기에 거룩하신 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절을 당하셨던  곳이었으며, 거룩이 상실된 곳이었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이 땅에서 에덴은 상실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사람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에덴 성전은 순종이 요구되었던 곳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순종이 완성된 곳이다.



언약 백성의 대표성

 

에덴에서의 아담은 최초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의 역할은 순종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를 가져왔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유지,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온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온전하게 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공동체가 살아가는 자기 땅에 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인류의 범죄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민족의 범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죄성이 어떠한 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어둠은 알지 못했으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구약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는 포도원 지기들이 포도원 주인을 거부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이 유대인들만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유효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희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였으며, 예수의 죽으심으로만 처음 아담의 범죄에 대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처형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제한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정된 자의 구원은 대표성 안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은 정당한가?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변해준다.

 

에덴이 창조 세계를 대표하였듯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특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변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는 존재이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시키거나 차별화시켜서는 않된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여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자신들의 죄가 아닌 유대인들만의 죄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였고, 급기야는 홀로코스트라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교회는 유대인 박해의 주체가 되기도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오셨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죄악으로 돌아가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었고, 신자는 둘째 아담 안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의 표현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이스라엘이시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에 숨었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변한 것이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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