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20. 3. 5. 22:14

동거문화에 대한 신학적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헬조선이라는 한국의 상황은 젊은 이들의 혼인에 대한 관점마저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결혼을 앞둔 젊은 층에게 동거는 헬조선에서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 예식의 비용은 둘째치고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갖지 않을 바에는 꼭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에 들어가기 보다는 동거가 더욱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경제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거는 결혼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꼭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 법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국에 비하여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거 문화가 법적으로 보장되었고 이미 사회속에 하나의 제도로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나라들도 있다.

 

법적인 뒷받침이 없는 한국에서의 동거는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을 안고 가야하는 불편한 생활방식이겠지만  서구 사회의 동거는 이야기가 다르다.

 

동거 문화는 포스트모던 서구 사회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동거하는 가운데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법적인 보장과 국가로 받는 혜택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에 대한 것과 차이가 없기에 동거하는 당사자들에게 자녀는 더이상 동거 생활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거하는 당사자들은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법적인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식을 할 필요도 없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유지할 때는 이혼이 자유롭지 못한데 반하여 동거는 언제든지 당사자의 합의 하에 서로가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다.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이 합의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다.

 

동거문화의 보편성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편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이 원할 때 결혼식도 가능하며 법적으로도 등록이 가능하다.

 

결혼과 동거의 주된 차이는 경제문제와 서로에 대한 책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거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합의하에 동거에 필요한 재정을 일정 부분 분담하면 된다.

 

서로가 상대의 경제권에 대해서는 간섭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자신의 독립적인 시간을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즐길 수가 있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하여도 간섭할 수가 있는 권리가 없을 경우가 많다.

 

간음죄라는 개념도 없으며 외도를 한다고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이 동거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결혼은 상대방에 대하여 담당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에 대하여 재산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본다.

 

루터는 죄인으로서 필요한 외부로 부터의 “낯선 의”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혼인법에 비추어 “행복한 교환”(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성화, 균형있게 이해하기 p55)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 당시는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할 때 법적으로 신랑의 모든 소유가 신부의 소유가 되고 신부의 모든 소유가 신랑의 소유가 되었다고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결혼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러한 “행복한 교환”이라는 틀이 유지되고있다.

 

대신 동거 문화에서는 “행복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거 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수 없고 다만 필요에 의한 거래를 할 뿐이다.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가 신랑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혼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원적인 죄인이기에 죄인이 거룩하신 분과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서는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교환이 일어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내면의 근원적인 죄, 그리고 죄의 잔재들은 그리스도가 가지고 가셔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으로 해결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소유하게 되어 의인이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됨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혼인관계를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중 전가의 개념이 바로 혼인 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행복한 교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동거 문화는 결혼이 담고있는 귀한 성경적 원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결혼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문화가 동거 문화로 바뀌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변화가 있다.

 

포스트모던 신학 가운데 하나인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전가 개념을 배제하기에 “행복한 교환”이 배제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동거 문화와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혼인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새관점에서와 같은 요구와 조건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행복한 교환이 있어야한다.

 

전가 교리를 귀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전가 교리의 유비적 형태인 행복한 교환이 없는 동거 문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동거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결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하는 교회는 동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제대로 말 할 수 있어야한다.

 

동거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상은 필요에 종속된 욕심으로서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청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는 필요를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한다.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혼인 관계는 우리가 파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은 올바른 결혼 문화를 통하여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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