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21. 10. 13. 20:17

요한복음 1장 11절에 비춰본 톰 라이트의 거짓말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들

 

새관점주의자들은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항하는 행동 방식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3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로마와 타협하고 아부하며 빌어붙어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다.

 

두 번째는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숨어사는 도피자들이다.

 

세번째는 로마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열혈주의자들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세가지 유형이 전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대변해준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할지, 희생적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은 로마였으며,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 당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예수는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를 자기 백성, 즉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2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있다.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이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

 

행위가 요구되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며, 새관점의 예수는 안식의 주인이 아니며,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왜곡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를 유대교 친화적으로 바꿈으로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새관점과 홀로코스트

 

예수를 로마인이 죽였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결코 현대 유대인들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새관점은 유대주의적인 노력이 많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http://www.reformanda.co.kr/theoJournal/98428)

 

새관점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있어왔던 여러 자유주의학자들의 주장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적 관점들과 성경신학적 관점들이 성경 자체를 근거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새관점은 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한 1세기 제2성전 유대교”, “슈바이처의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라는 3가지가 주된 틀로 구성되어있다.

 

새관점의 출현의 배경에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 있다.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의 예수에 대한 해석을 취합하여 새로운 의를 산출해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새관점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복음을 유대교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최소화시킨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삼위일체적 예수라고 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 된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려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있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을 강조하며, 신약의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실 때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다.

 

어둠과 빛, 주검과 생명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이시며, 연장과 확장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가 없는 단절된 반대의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표면적인 개념이다.

 

이면적으로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만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만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 주장들은 기독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거짓된 결과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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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1. 10. 13. 20:13

요한복음 1장 11절을 통해본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오류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정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 실은 잘못된 관점인 것이다.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명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성당의 벽화에서는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의 벽화를 통해서 교회 차원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지속하기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유대인 핍박에 대한 표면적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기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도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으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꾸지 않고는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을 들 수 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유대주의적으로 바꾸면서, 율법주의를 신율주의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따름의 대상으로,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구원론 등을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시도들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관점은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 11절을 묵상하며 살펴보고자한다.



창조주의 주권을 위한 언약공동체

 

예수를 죽였다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덴 공동체는 타락 이전의 공동체였지만, 타락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 공동체의 특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주어졌던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졌던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거하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단순한 소유권의 행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임함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한 조건적 축복으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렇게 위임을 받고 형성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며, 에덴은 최초의 언약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 후에 만들어진, 처음 언약 공동체였던 에덴의 재연이었다.

 

처음 에덴공동체에서의 아담이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산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된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언약공동체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분리를 전제로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거절을 당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에덴은 타락을 수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불순종한 아담에게는 거주가 허락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하지 못하였기에 거룩하신 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절을 당하셨던  곳이었으며, 거룩이 상실된 곳이었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이 땅에서 에덴은 상실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사람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에덴 성전은 순종이 요구되었던 곳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순종이 완성된 곳이다.



언약 백성의 대표성

 

에덴에서의 아담은 최초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의 역할은 순종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를 가져왔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유지,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온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온전하게 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공동체가 살아가는 자기 땅에 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인류의 범죄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민족의 범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죄성이 어떠한 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어둠은 알지 못했으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구약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는 포도원 지기들이 포도원 주인을 거부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이 유대인들만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유효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희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였으며, 예수의 죽으심으로만 처음 아담의 범죄에 대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처형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제한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정된 자의 구원은 대표성 안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은 정당한가?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변해준다.

 

에덴이 창조 세계를 대표하였듯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특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변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는 존재이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시키거나 차별화시켜서는 않된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여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자신들의 죄가 아닌 유대인들만의 죄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였고, 급기야는 홀로코스트라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교회는 유대인 박해의 주체가 되기도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오셨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죄악으로 돌아가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었고, 신자는 둘째 아담 안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의 표현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이스라엘이시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에 숨었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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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0. 3. 5. 22:14

동거문화에 대한 신학적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헬조선이라는 한국의 상황은 젊은 이들의 혼인에 대한 관점마저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결혼을 앞둔 젊은 층에게 동거는 헬조선에서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 예식의 비용은 둘째치고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갖지 않을 바에는 꼭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에 들어가기 보다는 동거가 더욱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경제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거는 결혼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꼭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 법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국에 비하여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거 문화가 법적으로 보장되었고 이미 사회속에 하나의 제도로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나라들도 있다.

 

법적인 뒷받침이 없는 한국에서의 동거는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을 안고 가야하는 불편한 생활방식이겠지만  서구 사회의 동거는 이야기가 다르다.

 

동거 문화는 포스트모던 서구 사회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동거하는 가운데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법적인 보장과 국가로 받는 혜택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에 대한 것과 차이가 없기에 동거하는 당사자들에게 자녀는 더이상 동거 생활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거하는 당사자들은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법적인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식을 할 필요도 없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유지할 때는 이혼이 자유롭지 못한데 반하여 동거는 언제든지 당사자의 합의 하에 서로가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다.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이 합의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다.

 

동거문화의 보편성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편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이 원할 때 결혼식도 가능하며 법적으로도 등록이 가능하다.

 

결혼과 동거의 주된 차이는 경제문제와 서로에 대한 책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거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합의하에 동거에 필요한 재정을 일정 부분 분담하면 된다.

 

서로가 상대의 경제권에 대해서는 간섭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자신의 독립적인 시간을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즐길 수가 있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하여도 간섭할 수가 있는 권리가 없을 경우가 많다.

 

간음죄라는 개념도 없으며 외도를 한다고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이 동거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결혼은 상대방에 대하여 담당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에 대하여 재산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본다.

 

루터는 죄인으로서 필요한 외부로 부터의 “낯선 의”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혼인법에 비추어 “행복한 교환”(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성화, 균형있게 이해하기 p55)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 당시는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할 때 법적으로 신랑의 모든 소유가 신부의 소유가 되고 신부의 모든 소유가 신랑의 소유가 되었다고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결혼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러한 “행복한 교환”이라는 틀이 유지되고있다.

 

대신 동거 문화에서는 “행복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거 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수 없고 다만 필요에 의한 거래를 할 뿐이다.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가 신랑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혼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원적인 죄인이기에 죄인이 거룩하신 분과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서는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교환이 일어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내면의 근원적인 죄, 그리고 죄의 잔재들은 그리스도가 가지고 가셔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으로 해결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소유하게 되어 의인이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됨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혼인관계를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중 전가의 개념이 바로 혼인 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행복한 교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동거 문화는 결혼이 담고있는 귀한 성경적 원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결혼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문화가 동거 문화로 바뀌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변화가 있다.

 

포스트모던 신학 가운데 하나인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전가 개념을 배제하기에 “행복한 교환”이 배제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동거 문화와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혼인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새관점에서와 같은 요구와 조건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행복한 교환이 있어야한다.

 

전가 교리를 귀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전가 교리의 유비적 형태인 행복한 교환이 없는 동거 문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동거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결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하는 교회는 동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제대로 말 할 수 있어야한다.

 

동거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상은 필요에 종속된 욕심으로서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청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는 필요를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한다.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혼인 관계는 우리가 파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은 올바른 결혼 문화를 통하여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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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상황 2020. 1. 21. 17:11

하나님의 저주에 담겨있는 축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저주로 보이는 현재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기 위해 준비되어지는 과정이다.

 

이번 글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비롯된 인생의 역경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한다.

 

인생의 현재적 삶은 과거와 동떨어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곳인데 인생의 삶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현재적 삶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담의 범죄와 에덴 바깥으로의 쫓겨남,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바벨론으로의 쫓겨남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면, 에덴의 바깥에서의 현재를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들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 바벨론에서의 삶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에덴의 바깥과 바벨론, 그리고 아담과 이스라엘의 유사성을 통해서, 에덴의 바깥 세상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벨론에서와 같은 삭막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경들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에덴의 바깥에서 살아가고있다.

 

인간은 개인이 죄를 저질러서 죄인이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처지와 매한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인간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신 것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면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 아래에 있다.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현재적 상황은 범죄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은 에덴의 풍요를 누리는 축복을 받도록 지어진 존재였다.

 

에덴의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되었다.

 

모든 인생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에덴의 동쪽 길까지 차단 당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야했다.

 

타락한 아담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땀을 흘린만큼 먹는 즐거움도 있으며, 인생의 수고의 결실로 인하여 풍요를 누리는 낙도 있다.

 

땅을 갈며 수고하여야만 결실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일까?

 

결코 아니다.

 

이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였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을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상황은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쫓겨난 상황으로 재연된 것이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잡혀갔었기에, 바벨론에서의 삶은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들도 마찬가지로 사탄의 종노릇하며 전적으로 부패된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만약에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바벨론에서의 성공과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을 잊은 백성으로서 영원한 멸망이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현재의 삶에서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을 것이다.



풍요의 에덴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바벨론은 가나안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에덴의 바깥이 에덴 동산과 대조를 이루었던 것과 유형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있는 것과 같다.

 

에덴의 바깥은 아담을 유혹하였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가나안에서의 예루살렘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었지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집합체를 이룬 곳이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약속되었지만, 에덴 바깥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땅을 갈아야만 하는 곳이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는 곳이다.

 

바벨론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수고의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었지만 바벨론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 간신히 먹고 살 수있는 곳이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던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에덴 바깥에서 땅을 갈아야하는 삶을 재연한 것이었다.

 

바벨론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 세계의 환경을 대변해주고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곳곳에 성전이 세워졌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바벨론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유수는 절망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바벨론에서의 삶은 바벨론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에 대한 징계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삶이 되어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또한 바벨론에서의 삶은 자신들의 죄성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시간이되어야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땅을 갈며 가나안에서의 풍요를 그리워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시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만 했다.

 

다시 가나안에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했다.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다짐을 다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상처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되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미 기력이 쇠한 그들은 구원자의 도움을 간절히 갈망하고있었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투쟁도 해보았지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들과 불칼로 가로막혀있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유다 마카비우스의 혁명은 지금까지도    하누카로 기념되고 있지만 이러한 무력으로는 성전을 회복시킬 수도없으며, 인간의 노력에 의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여야만 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

 

인간이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상당부분에서 바벨론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바벨론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여야했던 세계였듯이, 에덴 바깥은 불순종한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경험하고있는 세상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인간들이 존재론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해주는 곳이었다.

 

에덴 바깥의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경험하게해주는 곳이다. 

 

문제의 핵심은 세상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성에 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풍요에 의해서는 죄를 깨닫을 수가 없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어려움과 고생 가운데서만 자신의 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에덴서 쫓겨난 아담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만 했듯이, 모든 인간의 수고는 불순종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강령이다.

 

비록 문명의 발전에 의해서 상공업이 발달되었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을 갈며 수고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지만 인간은 이를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불순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의 길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명의 발전과 도시 문화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독립하고자하는 정신이 근원에 자리잡고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고자한다.

 

인간은 살기위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최선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최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망이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발전되어질 수도있다.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보다는 하나님없이 살아가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있다.

 

끊임없이 도망가고자하는 인간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를 구원하시고자 요나와 같은 어려움을 주시기도한다.



절망적인 환경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있다.

 

인간이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되는 절망들은 대부분 육신적인 절망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으시기에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과 같을 수가 없다.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삶은 이익이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자아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이익의 실현은 자신의 명예욕과 성공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키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어떠한 인생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을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죄인이다.

 

인간의 자아실현은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킨다.

 

특히 성공한 인생에서 자신의 죄성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내면에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한번쯤은 어느 순간에 심각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깊은 좌절감에 빠져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붙들기가 쉽지가 않다.

 

인생이 절망에 처해있는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종종 인간 관계가 최악의 상황이 되기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있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오신 분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주님을 외면한 세상의 화평은 독이될 수 있다.

 

주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시기도한다.

 

사람들은 평화를 외치지만 하나님을 외면하는 평화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와의 전쟁, 자연 재해, 사회의 죄악, 인간의 질병등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결코 해결될 수 없지만 이러한 불행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있다.

 

표면적인 평화와 안정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에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삶이 평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제동이 걸릴 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고통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살아가야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의무는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깨져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면서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살아간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지만 인간은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로 드러날 때까지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가 드러날 때까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 해결책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표면적인 해결은 근원적 문제를 외면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지속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고 살아간다면 이러한 상황 자체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 삶의 풍요로 인하여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밖으로 쫓아낸 아담에게 그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심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이는 인간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고생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일그러졌지만 그나마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형상이 남겨져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되어있으며, 영원한 것을 갈구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자한다면 인생의 절망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여야한다.

 

인간은 준비되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인간은 절망의 상황에 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로하여금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끔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면서 다가오신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땅을 가는 수고와 고통이 주어졌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함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

 

아담의 범죄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아담의 땅을 가는 수고는 바벨론에서 재연되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시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을 통하여 자신들이 근원적인 죄인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은 자신의 현재적 삶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교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생은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택함받은 이들은 자신의 교만함이 무너지는 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역경과 어려움, 극단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 우울증, 좌절감, 절망, 고통, 외로움….등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들이 예고도 없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덮치기도한다.

 

고통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고통의 시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의 시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한다.

 

심지어는 고통 자체가 너무 힘들어 목숨을 끊는 이들이 부럽기까지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시간에 가장 가깝게 다가오신다.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말씀 가운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누구를 원망하기 이전이 자신이 그렇게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불행의 근원에는 자신의 교만이었으며, 이제껏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못 알고있었는지를 알게된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은 죽음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임을 새롭기 깨닫게 된다.

 

자신의 고통의 시간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시간이며 자신이 죽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결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에덴 바깥에서의 삶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태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태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바벨론에서의 삶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기다리는 삶이다.

 

바벨론은 변화되지 않고 멸망당했다.

 

이 세상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합된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기에, 성도는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때가 차면 성도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삶의 고통은 영원한 것을 위한 마중물과 같이 성도에게 필요한 과정이기에,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역경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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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상황 2020. 1. 16. 12:35

진리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



들어가는 말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이 어떠한 죄악을 범하고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를 소유했다고해서 모두 다 자유케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사람은 살리기도하지만 죽이기도한다.

 

참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적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이 생명 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면서 아담 부부를 에덴에서 쫓아내신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는 주체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 부부는 자신들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스스로가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게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판단의 주체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왕권으로 다스리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관리하는 제사장직을 맡았음을 알려주고있다.

 

에초에 인간은 창조시부터 모든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로 창조되지 않았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가운데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으며, 모든 일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처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었던 모습과 대조를 보여 주신다.

 

진리를 소유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고하는 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려고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는 사람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이며, 둘째는 그 나무의 열매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 열매에 약효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선악을 알게된 것은 불순종에 따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 부부는 선악을 알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되었다는 것은 스스로가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움직이겠다는 불순종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참조 사항일 뿐이지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교회 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가고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육신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며, 말씀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된 방식으로 적용시키기도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이러한 기복 신앙에 축복을 남발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도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기에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교회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을 한다.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 안에 나타나는 죄의 결과물로서,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끊임없는 먹는 죄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범죄한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났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만약을 가정을 하여 아담 부부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이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이는 영원한 지옥의 삶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고 기록하고있다.

 

아담은 에덴 성전에서 성령에 참여한바되었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피조 세계를 왕으로서 다스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으면서 에덴에서의 풍요를 맛보았지만, 처음 아담이 범한 죄로 죄인이 된 이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으로서의 교회에서 다시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성직자나 교인들의 타락, 다시 말하면 교회의 영역에서 자신들이 선악간에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결정권 자가 된다면,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가 없으시기에 이들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소유한 성도들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주체가 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 선악과를 먹는 행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정치 참여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 개인은 사회의 일원이면서 또한 교회의 일원이다.

 

성도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가 교회의 일원이라고 할지라도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서 마땅한 것이다.

 

성도의 정치 참여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참여하여야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서 정치 참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기에, 성도의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규정하는 자연법을 근거로 하여야한다.

 

자연법은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유지하는 규범으로서 교회의 성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규범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자연법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법, 즉 성경 말씀을 근거로 존재하고 움직여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택하신 자의 구원에 있다.

 

구원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행된다.

 

이 세상에 대한 보존은 아브라함 언약보다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한다.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최후의 심판 때까지 더 이상 노아의 홍수와 같은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노아 언약은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언약도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기관이다.

 

세상의 제도와 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세워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운행되는 교회와 자연법을 근거로 운행되는 사회 기관은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다른 목적으로 운행되고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지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에만 속하여있다.

 

성도와 달리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으로만 운행되어야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면 이는 자연법을 근거로하는 사회 기관에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을 강요하는 행위가 된다.

 

신앙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느 편에 서든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성전인 에덴에서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 되려했던 아담의 선악과 범죄와 같은 맥락에 서게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칼빈을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인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집단적 정치 행위를 하였던 것은 당시 유럽의 여러나라가 종교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룬 신정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정치는 목적과 운영체제가 다르기에 결코 어떠한 결론적 형태를 이루어낼 수 없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에덴에서 쫓겨났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을 넘어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결정권자 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에덴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곳이었다.

 

에덴은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도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에덴을 재연하고있듯이, 이 세상은 바벨론을 재연하고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나 공통점은 자신들이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최종적 결정권자인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범죄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잘못된 사회 체제를 직면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문화는 대부분 사악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벨론 사회를 개혁하라고 하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수동적이었지만 에스더의 정치 참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 멸절시키고자한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정치 문화에 참여 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참여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 즉 자연법을 근거로한 백성으로서의 참여였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궁극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하지만 이 세상 문화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했지만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만 적용한 것이며 결코 바벨론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상식적 논리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 적용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손에 잡혀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납득이 안되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시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이는 주권이 침해당하고 농락 당하는 일이기에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일이며,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 해방 전쟁을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더군다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고 어린 아이까지 다 죽이는 것은 인륜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자연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판단하는 진리의 주체이시다.

 

진리는 인간이 절대화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 절대화시킨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간이 법을 절대화시키고자한다면, 이는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와 한 가지이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사회법은 단지 인간 문화에서의 법일뿐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적용될 때에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될 때에는, 그 인간의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데서만 진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자 선악과를 범했지만 그는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었다.

 

참진리는 인간을 자유케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될 때에는, 이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자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될 때 인간은 사탄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허용 범위 안에서 적용될 때에만 인간은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었듯이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순종이 요구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영역을 침범한 아담은 더 이상 에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기에 에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이들은 또 다시 아담의 죄를 범하는 것이된다.

 

이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는 없다.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교회를 허무는 이들이며, 이들의 행위는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
카테고리 없음 2020. 1. 3. 22:01

하와를 유혹한 뱀의 공동체성과 대표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뱀은 하와를 유혹하였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지만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는다(창 3:14)

 

이번 글에서의 논점은 뱀이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말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는 다른 가축과 들의 짐승들은 저주를 받지 않았지만 뱀만 심하게 저주를 받았다는 해석이고, 또 하나는 다른 가축과 들의 짐승들도 저주를 받았지만 뱀은 다른 가축과 들의 짐승보다도 더욱 심하게 저주를 받았다는 해석이다.

 

필자는 후자에 동의하면서 이에 대해 논하고자한다.

 

그럼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은 뱀으로 인하여 왜 함께 저주를 받았어야만 했는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이 뱀으로 인해서 함께 저주를 받았다면 뱀은 대표성을 가지고 더욱 저주를 받은 것이 된다.

 

뱀이 대표성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하였다면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도 마찬가지로 하와를 유혹하는 일에 동참하였음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필자는 몇가지 예를 들면서 뱀이 가지고있는 대표성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논하고자 한다.



다스림을 받아야 할 존재로서 뱀

 

우선은 여자를 실족케한 뱀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살펴보고자한다.

 

뱀은 아담이 다스려야할 존재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생물에 대한 통치를 명령하셨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묘사하고있는 짐승(חַי  chay)은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명령을 근거로 아담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할 생물(חַי  chay)과 동일하다.

 

아담이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모든 생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은 아담의 통치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것이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행사되었던 곳이었다.

 

에덴에서의 모든 생물은 아담의 3중직으로 인해서 성전으로서의 에덴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덴에서의 모든 생물은 아담의 통치를 받음으로서 성전이 보존될 수 있었다.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통치권에는 적대 세력에 대한 방어적 성격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이 생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생물은 다른 존재, 즉 사단에게 이용당하면서 에덴을 훼손할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성전인 에덴을 무너뜨리고자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생물들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사단은 자신의 계략을 극대화하고자 에덴에서 가장 지혜로운 짐승을 선택하였으며, 뱀이 여기에 선택되어진 것이다.

 

간교로 변한 지혜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간교하다는 것을 내포하고있다.

 

들짐승도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짐승을 지으셨지 간교한 짐승을 지으시지는 않으셨다.

 

창세기 3장 1절에서는 뱀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말하고있다.

 

들짐승이 간교하다는 것은 들짐승들이 사단에게 어느 정도는 이용당하고있었기에 간교해진 것이지 하나님께서 들짐승을 간교하게 지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짐승에게도 지혜를 주셨다.

 

그 가운데 뱀을 가장 지혜롭게 지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뱀같이 지혜롭게 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지으신 들짐승도 사단에게 이용당할 때에는 간교한 들짐승이 되는 것이다.

 

뱀은 아담에게 지배를 받기보다는 사단의 도구로 쓰임받았기에 간교한 들짐승이 된 것이다.

 

들짐승들이 간교하게된데에는 아담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담이 들짐승들을 완전하게 통치를 하였더라면 들짐승들이 사단의 도구로 이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자가 뱀을 만나 친근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여 알게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는 존재와의 만남에는 항상 경계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에 대하여 전혀 문제의식이 없었다.



뱀의 대표성과 공동체성

 

사단이 뱀을 이용하여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공략하는 모습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공략하였던 블레셋 족속의 모습에서도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골리앗은 블레셋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것은 개인적인 동기에서 개인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을 대표해서 공적으로 행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였던 것도 마찬가지로 공적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한 것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의 이마에 돌이 박히게 함으로서 골리앗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승리를 넘어서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행동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성전이 있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그리고 스스로 성전이 되신 그리스도는 에덴의 회복을 넘어 에덴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의 패배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승리로 마무리 된다.

 

처음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며 둘째 아담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신다.

 

에덴을 공략했던 뱀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머리가 상하게 된다.

 

아담과 뱀,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은 모두 공동체적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아간의 범죄는 개인적인 범죄였지만, 아간은 개인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일원이라는 공동체성을 가지고있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기세가 등등했던 이스라엘은 아이를 치려고 올라갔다가 아모리 사람들에게 패배를 하게된다.

 

패배의 원인은 아간의 범죄였다.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공동체성을 가지고있다.

 

또한 역사의 사건들은 유형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 반복된다.

 

골리앗의 대표성과 다윗의 대표성은 들짐승을 대표하는 뱀과 구원받을 자들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와 역사 안에서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골리앗이 블레셋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도전하였듯이, 뱀은 들짐승들 가운데 대표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도전한 것이었다.

 

골리앗은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가장 건장하여 대표로 나섰던 것과 같이 뱀은 간교한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하여 여자를 유혹하는 대표로 차출된 것이다.

 

국가 대표 선수들은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하며, 이들은 그 분야에서 가장 특출났기에 선택받은 것이다.

 

축구 한일전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승리가 곧 백성들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뱀은 들짐승 가운데 선택되어 대표성을 가지고 사단에게 이용을 당한 것이다.



공동체적으로 임한 저주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일에 성공함으로서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은 더 이상 아담의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되었다.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은 제각기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적합한 역할을 해야하지만 이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아담을 범죄케한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여야할 아담도 더 이상 실행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저주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

 

모든 생물들도 마참가지로 창조 목적에 따라 아담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하지만, 더 이상 아담의 다스림을 받지 않게된 생물들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뱀이 아담을 타락시킴으로서 더 이상 아담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은 아담을 타락 시킨 뱀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모든 생물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로서,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온전하게 사용되어질 수가 없었다.

 

여자를 유혹하였던 뱀의 행동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영향을 미쳤기에 뱀의 행동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을 대표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뱀의 행동으로 인하여 모든 간교한 들짐승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축에게도 마찬가지 저주가 내릴 수밖에 없었으며, 여자를 유혹한 뱀은 더욱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아담을 위해서 지어진 모든 창조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는 아담에게 향하여있었다.

 

아담이 범죄한 이상 모든 창조 세계는 창조 목적에 적합한 온전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창조 세계를 악용하고 파괴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핵무기를 만들라고 광물 자원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저주에는 사람을 향한 구원의 축복이 담겨있다.

 

창조 세계는 인간의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음으로서많은 순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동을 위해서 창조 세계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땅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 것은 자연의 순기능이 인간의 악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을 위해서 지어진 창조 세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담의 통치에서 벗어난 피조 세계는 사단에게 악용될 수 있기에 하나님의 저주는 사단의 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이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되는 날까지 모든 생물이 아담의 통치를 받으며 아담의 통치 아래에 있었더라면 모든 생물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안식의 축복을 누렸을 것이다.

 

피조 세계는 아담의 순종으로 안식에 이르는 복된 길에 있었어야했는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안식을 제공해주는 축복의 수단이 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뱀의 행동은 모든 생물들을 넘어서 모든 피조계에 영향을 끼쳤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을 제외한 뱀에게만 저주를 내리셨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의 반역성을 억제함으로서 타락한 아담을 보호하려는 은혜가 내포되어있다.

 

특히 뱀은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과 더욱 멀어지게됨으로서 사람을 유혹하는 간교함이 억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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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상황 2019. 1. 19. 17:07

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단순한 느낌을 넘어서 허무감에 압도되어 침물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자신의 과도한 의욕과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좌절감에서 오는 허무감도 있겠지만, 적당한 의욕, 혹은 최소한의 권리마져도 빼앗긴 상태에서 엄습해오는 허무감은 감당하는 것 조차도 힘든 경우도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능력의 한계가 있기에, 자신이 감당할 능력을 넘어서는 짓누름은 인생을 깊은 좌절감으로 몰아가기도한다.


엄습해오는 허무감과 좌절은 우울증으로 이어지며, 의욕이 상실됨 삶은 끌고 가는 것 조차도 힘들어진다.


뜨거운 물에 눈이 녹듯이, 고통이라는 뜨거운 물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좌절의 심연을 빠뜨린다.


이전에 열심을 내었던 것들은 허무해지며, 과거의 추억들은 과거일뿐, 현재의 자신과는 관계없는 순간들로 기억된다.


친근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멀어져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리기도하고,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면서, 버려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버림받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무관심과 배반, 열심을 내었던 직장에서의 상실감등은 허무를 넘어 분노와 증오로 이어지기도한다.


분노와 증오는 자신을 움직이는 또 다른 삶의 동력이 되기도하지만, 왜곡된 동력은 또 다른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며 인생을 더욱 허무 속으로 몰아가기도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반전이 될 수 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지렛데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이 변화될 때 좌절과 고통이 또 다른 희망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광주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불행을 경험하면서, 마음 속 가득히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지만, 생각이 변하는 순간,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여지기 시작했으며,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더불어, 상실되었던 삶의 의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도하였다.


비록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삶은 허무와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인생은 분명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순간들


어느 순간부터 예전에 열심을 내었던 일들이나, 자주 만나 삶을 공유했던 이들이 잊혀지면서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허무감을 밀려오기도한다.


어린 추억이 담겨있던 집을 방문해보면, 옛 추억의 현장들은 변해있고, 옛 추억의 동창들을 만나보면,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변해있었다.


이와 더불어 예전의 삶을 기반으로 서있던 자신의 모습은 초라해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아마 똑같은 삶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추억의 순간들은 사라졌지만, 추억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있고 미래의 삶이 존재한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순간 순간 사라지는 것들은 허무 할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예표한다.


순간의 것들은 영원한 것을 구성하고, 예표하는 유형적 표상이다.



허무함으로 다가오는 육신의 연약함


인생의 허무함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다가 온다.


육신이 강건할 때 영원한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않고,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얻기 원한다.


육신의 연약함은 현재적 삶에 대한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기력이 쇠하기에 의욕은 상실되고, 예전과 같지 않은 몸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바라보며, 세상에서의 의욕보다는 활발했던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를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만나는 이들보다는 이별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며, 자신마져도 옛 추억들을 가슴에 간직하고서 이 땅과의 이별을 준비하게된다.


인생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이 땅과 이별해야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허무한 삶을 이루어 나가지만, 궁극적으로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생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감될 때 더 이상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죽음 후의 삶이 허락된다하더라도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 이루어내었던 것이 천국에서의 삶에 영원히 보존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없다.



의지할 대상이 아닌 인생들


삶 가운데 만나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귀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은 무력해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타락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육신이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땅에서 의지할 대상들을 만들어간다.


의지할 대상은 어느덧 자신의 우상이 되어버린다.


교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없다.


교회가 의지할 대상이 될 때 교회의 목사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며, 우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교회가 섬김의 대상이 될 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신앙 생활이 자칫 우상을 숭배하는 생활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우상이 되어버린 목사는 탈선할 수밖에 없으며, 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은 허무함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교회를 의지할 때, 삶의 활력이 되어야할 교회 생활이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버리기도한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이 세상의 것들을 쫓아가는 육신이 되었다.



허무함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시면서 또 거두어 가시는가?


세상적 관점에서본다면, 인생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허무한 삶일 뿐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을 살아갈 힘이 주어진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불행이 없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배제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만 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한 존재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에게는 스스로 삶의 활력을 느끼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활력과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육신을 위한 삶은 자기 만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육체를 위한 삶이 동력이된 인간에게 더 이상 자기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인간에게 있어서, 동력은 오직 육신의 소욕을 위한 것이다.


욱신의 소욕으로 축적된 재물로는 결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


성공한 인생이든, 실패한 인생이든 허무로 귀결되는 것은 한 가지이다.


하지만 성공한 인생은 자기 만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실패한 인생은 그 고통이 하나님을 찾는 동력이 되어, 생명에 이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실한 마음과 삶의 고통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도록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허무함과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환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외부의 강압적인 환경이 없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수가 없다.


아담이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다함은, 그 육신의 소욕에 종속되어, 하나님 대신에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인간의 육신의 삶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가나안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풍요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은 애굽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잊어 버렸을 것이다.


애굽에서의 풍요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인생을 영원한 음부로 이끌뿐이다.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와 고통은 인생에 생명이 없음을 인식하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몸에 문제가 있어도 고통이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치료의 기회를 놓쳐버릴수밖에 없다.


의사는 아무 불편을 호소하지 않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지 않는 인생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으신다.


고통과 허무함으로 인한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영원한 것만이 고통과 허무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쁨은 허무함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자의 밥이 되며 죽어가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전의 삶에 대한 허무함보다는 앞으로 경험하게될 새로운 인생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서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허락되었기에,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영원한 삶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된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 자체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외롭고 힘들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행동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같이, 이 세상의 고통이 나를 집어 삼키려할지라도, 오직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인간이 옆에 있는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척이나 힘들 때일수록 기도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준다,


힘든 인생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기에, 성도는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 타락한 아담이 원망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무력하셔서 아담의 범죄를 막지 못하셨는가?


아니면 마치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의 함정 단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목격하시고도 징계를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방치하셨는가?


이 두 가지 다 결코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의 인격체이다.


아담의 인격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다.


아담의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참된 인격체는 자신이 결정한 행동 방식이 존중받을 때 참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선택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세우심으로서, 창세 전 미리 택정한 자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인생은 택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의 고통을 통하여 출애굽으로 이어졌듯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삶 가운데서의 고통을 통하여, 택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것들을 위한 순간들


순간의 시간들이 없다면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가 없다.


비록 창조 세계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많은 부분 파괴되고 변질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결코 허무하게 무너진 세계가 아니다.


순간이 영원이 되고 허무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바뀌고 고통이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다.


땅에서의 것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이 인생의 구원과 천국을 예비하는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이 될 수 있다.


인생의 과정들은 땅에서의 순간들이 영원으로 열매맺는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죽어있는 삶에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이며, 인생은 죽어가는 것 같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명력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인간은 허무함과 고통으로 뒤덮이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을 수가 없다.


삶은 살아있는 인생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적으로 죽어있는 인생들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복음을 받기 전에는  실상은 죽은 자였었다고 말한다.


인생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다.


인생은 생명을 제공받을 수 있는 그루터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생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 땅에서의 인생이 없었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인생을 알게되고 영생을 알게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지를 알게된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풍성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한다.


다양한 과실들과 자연의 오묘함과 광대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은 영원한 것의 유형적 표상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을 예표하고 경험하는 삶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다양성에는 영원한 실상의 유형적 모형들이 담겨있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통해서 처음 창조시의 영적인 몸을 그려볼 수가 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예표하였으며, 이 땅에서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인생의 삶에 생명을 예표하는 모형과 그림자가 없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이 허무함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것들 조차도 시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성도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교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함과 좌절과 우울증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없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복된 삶


만약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오직 창조주이실 뿐 구속주는 아니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알 수 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측정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나타날 수 있었듯이,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행과 고통과 허무감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할 수 있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생들이 있었기에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으로서의 혼인을 위한 것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인생은, 이 땅에서의 삶을 허무로 마감하여야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는 복된 삶이다.


대통령도 아닌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연합된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어찌 복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인생


이 땅에서의 인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인간 자신은 자기의 길을 계획하지만 이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주관하시면서 이루시는 일들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땅의 인생들은 결코 무의미한 인생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때가되면 추수를 하실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은 추수할 결실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으면, 하나님께서 추수할 결실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이 땅을 창조하시고서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에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신 것이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허무한데 굴복하였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듬뿍 나타내심으로서, 자신의 창조를 사랑으로 새롭게 다듬어 가신다.


인생 가운데 경험되어지는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과 허무등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기회를 제공해준다.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하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결실의 원동력이기에, 그 안에 담겨진 보화가 발견되어져야하는 시간들이다.



자연법에 묶인 인생


사랑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을 근거로 창조 원리를 설명하려고하지만, 과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다.


과학은 무에서의 창조를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시다.


과학으로는 부활을 설명할 수가 없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자연 과학에 대한 승리이다.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와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초월적 세계가 상실된 자연법에 묶이게 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에게는 오직 저주만 있었듯이, 자연법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오직 심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생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육신이 되었기에, 육신이 된 인생은 타락 이전에 아담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 수사 없게되었다.


과학으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설명되어질 수가 없다.


과학으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설명되어 질 수가 없다.


과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지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의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을 초월한다.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는 인생은 늙고 쇠약해지면서, 허무감에 무너져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생명을 얻은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참여되어지는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인생은 허무함에 무너져내리는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인생이기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을 감쌀지라도, 성도는 자신 안에서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여야만 한다.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는 순간들


신약이 없는 구약은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희망의 빛을 상실하였다.


구약만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끝나는 인생은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가나안 땅이 없었다면 영원한 천국을 소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영원한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이 없는 신약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신약은 구약을 근거로 존재한다.


욕심과 낙망과 좌절과 죽음이 없이는 영원한 삶을 소망할 수가 없다.


순간은 영원의 근거가 된다.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안에 생명을 품을 수 있다.


현상 가운데 담겨있는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다.


현상만을 쫓아가는 세상에서의 성공은 피상적인 것일 뿐, 그 안에는 썩을 것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세강에서 아무리 성공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고,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생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문명의 발전은 허무함이 원동력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함에 굴복하는 인생에게 생명를 주시고자하지만, 인간들은 문명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해보려고한다.


문명 기술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현상만을 쫓아갈뿐 그 안에 담겨있는 실체를 극복하지 못한체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고통의 실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지만, 현상만을 쫓아가는 문명의 기술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문명 기술 안에서 소망을 품을수록,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은 줄어들 뿐이다.


문명의 기술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들을 제거해나간다.


첨단 과학으로 표현되는 현대 문명의 현상들은, 이전의 것들을 비문명적이고 구식으로서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첨단 문명이라는 기술은 현재성의 근거가 되는 기준들을 제거해버린다.


현재의 첨단 기술은 어느 순간엔가는 구시대의 산물로 바뀌어 버린다.


현재의 기술에 의존하였던 인생들은 어느 순간엔가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있게 된다.


기술 문명에 의지한 인생들은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술 문명 사회에서는 노인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기술 사회에서 권위는 허상일 뿐이다.


어른은 결코 권위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첨단에 앞장서는 젊은이만이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문명 기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사조의 표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 자리잡을 곳이 없다.


문명 사회의 결핍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결핍으로부터 기인되지만, 문명 기술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기회를 막아버린다.


발전되어지는 문명 기술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성을 찾아보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신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덜 발달된 원시적인 곳으로 묘사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육신의 것으로 대체해버린다.


기술의 발전은 아담 안에서 반역한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개벽이라는 뜻을 지낸, 인류 최초의 도시인, 에녹이라는 성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도시 문명과 함께 고도화되는 기술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의 정신을 어이받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기술일 뿐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더 들어설 자리가 상실되어갈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척이나 멀어져간 인간들을 더 이상 놓아둘 경우 이 땅은 완전한 지옥이 될 수밖에 없기에,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말씀에 비추어 시대를 분별하여 보면, 무척이나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이다.


현 시대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기술의 문명에 의지하여, 거짓 것에 희망을 가지고 유혹을 쫓아가는 시대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

마지막 때에는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심판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짓된 유혹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상실된 기술 사회는 불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육신을 쫓아가는 인간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고도화되어가는 첨단 기술이 주는 유혹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그 속성상 영적인 몸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첨단 기술은 육체가 된 인간의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는 기술 문명에 빠진 인간들의 삶은 허무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은 오직 피에만 있다.


피가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으로 얻은 자기 만족에는 생명이 없다.


자기 만족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인간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왜곡시킬 뿐이다.


첨단 기술은 인간을 빨아들이는 매력을 가지고있지만, 그 가운데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으며, 허무만을 남길 뿐이다.


현대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평안과 행복은 생체 호르몬을 순화시켜서 더욱 삶의 의욕을 주시만, 첨단 기술은 그 특성상 인간의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만을 자극시켜서 인간을 흥분시킬 뿐이다.


공급이 없는 소비만 촉진 시킬 뿐이다.


허무함과 우울증은 공급이 없는 소비의 당연한 결과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손길이 내미셨듯이, 허무함과 우울증이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허무함과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단상/그리스도 2019. 1. 1. 10:44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선한 행동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보게되면 일종의 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7)”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의를 근거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이들이지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이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희생적 역할을 감당하려는 이들이다.


만약에 인간이 서로 희생적으로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 세상이 살기 좋은 유토피아적 낙원이 될 수 있다면,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약에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키면서, 가나안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세상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부강하고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당위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서 세상이 낙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살아있는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막고 다시 살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서 낙원을 기대한다거나, 죽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개념은 성립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미 죽어있는 세상이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는 자신이나 이 세상이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이 아무리 평화롭게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자이기에, 최종적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생명체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지니고있었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었던 생명이 상실되면서, 인간은 죄성을 가진 육신natural body이 된 것이다(창 6:3).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서로 낙원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가 없는 곳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한다.


인간은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극단적인 불행에 직면하지 않고는 좀처럼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대부분 환경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한 환경은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환경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불행과 죽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현실적 상황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인간의 당하는 불행과 죽음은 실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체로서의 인간의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이 없다면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을 깨달을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 불행과 죽음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인간은 실체로서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될 것이다.


인간의 표면적인 불행과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불행과 죽음의 근원과 실체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로서의 죽음을 외면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적 선행이 죽음의 실상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추구된다면, 선은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을 외면시키는 피상적인 수고들이 인간적으로는 선한 행위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를 수반하는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실상이 죽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바리세인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식적 행위가 거짓된 악한 행위임을 지적하신다.


이와는 달리 곤궁에 처한 자를 도움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을 유형적으로 나타내고자한다면,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긍정적인 것이다.


인간의 현상적인 행복과 불행은 항상 양면을 가지고있다.


인간의 육신이 풍족한 가운데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하지도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려고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행복한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되기는 쉽지가 않다.


반대로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사람이 당하는 심각한 고통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가운데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풍요로웠으면 출애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애굽에서 풍요가 계속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림받은 민족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에야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애굽이던, 가나안이던, 인간의 풍요와 안정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궤변의 양면은 육신이 된 인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육신의 풍요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 궤변은 이스라엘만의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도 적용이 되며, 죄성은 가진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에서의 직업적 성공이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모든 상황은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형식은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끔 인도하여야만 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죄가 고발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자만이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무저갱에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무저갱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과 동일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행과 고통이 있기 전까지는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찾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세상의 불행한 상황과 죽음에 직면한 상황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을 위해서 불행을 방치하는 행동은 결코 옳지 않은 극단적인 행동방식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 세상을 행복하고 죽음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로 만들어가는데 전념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삶 가운데서의 불행과 고통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긍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기회로 삼아야한다.


불행한 현실이 구원의 특별 은혜로 인도되는 통로가 된다면, 불행한 현실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있다고 할 수 있다.


성도는 불행한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가운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없이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열어갈 수는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지니고있었다.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셨던 영적인 몸이 상실됨으로서 실질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타락한 인간은 실상은 죽은 자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에게 전하는 복음으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함으로 이미 영적으로 죽었으며, 동시에 생명력이 상실된 육신이 되었다.


육신에는 죽음의 개념이 담겨있다.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지 않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실상 죽은 몸으로 살아가고있지만,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죽고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입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표면적인 육신natural body을 입고 살고있는 것이며, 그 안에 참 생명은 이미 상실된 죽은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내려가심은, 육신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며,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살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신 부활체를 통해서 유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오심은,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부활을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갖게 하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신 영적인 몸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입을 영적인 몸이다.


모든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적인 몸이 부활될 것을 약속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영적인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완성될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각종 통신 매체들은 온갖 사건과 사고의 소식을 전하고있지만, 이는 죽은 인간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산자로  살아가고있는 것은, 구속사의 큰 틀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그치는 그날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영원한 죽음, 즉 무저갱에 내려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죽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의감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해보려고하지만, 이러한 행동 방식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에 속하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이 극대화된다고해서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선행으로 세상이 완전하여진다면, 이러한 세계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자기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며, 이러한 나라에서는 사탄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놓인 세상을 다시 찾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인간이 선행을 근거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에 근거하지 않은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삶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킨다하더라도, 그곳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속이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으며, 그곳에서의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던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셔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리 마시라고 항변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하신다.


베드로가 스승을 걱정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오히려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 방식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의 한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 고통과 역경이 필요하다면, 고통과 역경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 가운데,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생각과 행위들이 종종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사탄의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혈연 학연 지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3:51-53)”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인간적이고 서로를 위한다고 모인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종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일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하나가 되려고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오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이며,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모임은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세상에서의 모임이 종종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기도한다.


성도는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서 모이게되어있다.


혈연, 학연, 지연을 따라 모인 인간은, 그 공동체의 특성 안에서 서로를 상대하여야한다.


공동체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23:57)”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분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성도의 역할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등으로 제약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회의 성도들이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으로 서로 얽혀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지역 사회의 교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다.


구성원들이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등으로 얽혀있는 교회에서 온전한 믿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은 인간 관계를 견고히 할 수는 있어도, 이들이 추구하는 인간적인 관계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바울은 율법을 가진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는 혈연, 학연, 지연의 극단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행위를 책망하고있다.


이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근거로한 율법주의와 자신들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한 민족적 우월주의에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평화는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그 소중함을 알 수가 있다.


평화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이다.


평화는 사람의 삶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이된다.


전쟁은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킨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바램이며,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에는 전쟁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평적 평화는 수직적 평화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하늘과 땅의 분리를 견고하게하는 땅에서만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


성육신과 더불어 가족 구성원간에 분쟁을 일으키신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화평을 깨신 분이시다.


하지만 수직적인 관계가 단절된 수평적 관계는 생명이 없는 관계이기에, 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평화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하나님을 배제한 하나됨은 오히려 이 세상을 사탄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진멸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어린 아이는 물론 가축까지도 죽여야만 했다.


그들의 재물과 가축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용됨으로서 부정한 것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다,


수직적인 화평은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제한된다.


인간 세상의 수평적 화평에는 거룩이라는 조건이 없다.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는 실현될 수 없다.


진정 이 땅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된 관계 안에서 평화를 추구하여야하며, 이는 실상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제한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은혜가 배제된 일반은혜의 보편화는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일반은혜의 한계내에서의 평화는 특별은혜를 대체하는 평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검을 주러오신 것과 같이, 교회는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는 거룩할 수가 없다.


톰 라이트는 종교 개혁 이후의 유럽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종교 개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평화와 진리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여야 할 경우에는 진리를 선택하여야한다.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유럽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안에서의 평화를 추구했던 사회였기에,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변화는 전쟁을 수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족 간에 불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검을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야하기 때문에, 진리를 선택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인간적으로 의학의 발전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만,  궁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유전자 가위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이지만, 그 사용 목적은 하나님과 진리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인간에게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들은 잘못된 성관계로 인하여 생기는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서 에이즈에 취약한 유전자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유전자 가위를 사용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각종 GMO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자연법을 배제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국가들은 무기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것이라고 말하지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구축은 하나님을 배제한 악의 활성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첨단 기술들은, 각자 개인이 진리의 기준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을 더욱 견고히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있다.


표면적으로는 첨단 기술로 무장된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


인간의 죽음의 상태를 더욱 견고히 하는 첨단 과학 기술은,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또 한 가지의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결론


인간의 표면적인 선행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행위가 될 때, 이는 바울이 책망하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상으로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일반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특별 은혜로 귀결 되어야한다.


기복 신앙은 인간의 죽은 육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것이다.


육신을 위한 교회는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교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올리려는 교회이다.


교회 공동체가 육신을 위한 공동체가 될 때, 그 교회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한때 유행하던 비지니스처치는 육신을 위한 교회였다.


요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늘어가지만, 교회 출석 교인들은 줄어들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는 수 없이 많지만 진정 나갈 곳이 없다고 한탄하는 현상은, 대다수의 교회가 육신의 소욕을 위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육신을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비록 인간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 관점에서의, 생명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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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0) 2018.12.16
posted by Wonho Kim
:
단상/그리스도 2018. 12. 16. 21:52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사람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자기 의를 근거로 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의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로 귀결된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된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 관계에 있는 적대적인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본능을 따라 행하게되어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간섲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행하고자하는 방식은 쉽고 어려움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기준이 된다.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인간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의를 성취하려던 유대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지라도 자기의를 성취하는 것이 육신의 소욕이었기에 이를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인간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가인이 얼굴을 붉힌 것과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스스로 의인이 되려는 자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다면, 영광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게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력화 될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승리를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의 속성에 담겨있었다.


아담의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모든 행동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의 기준이되며, 인간이 스스로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탐심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인간 스스로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데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은 일종의 하나님과의 힘겨루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인간의 공로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존심의 붕괴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한다.


가인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히고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길을 선택하였다.


가인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서의 에녹성은 개벽, 즉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독립선언이었다.


가인의 독립 선언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구체적 표현으로서 아담의 범죄의 표상이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은혜의 자리에 초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 사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행위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부인하면서, 이미 타락한 아담 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던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은 자신의 죄를 깨닫은 백성들에게 비로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을 상기시키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유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바벨론 포로와 같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가운데 부패한 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자유가 없는 노예의지로 본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행위 구원론적 사상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패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로 삼았다.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


개혁주의의 변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개혁주의에 속하여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려는 행동을 취하게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자신의 관점과 혼합시키면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내리는 행위를 하고있음을 본다.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신칼빈주의를 혼합시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같은 이들을 들수 있다.


성도는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끌어내려고하지말고,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마음과 입에 가까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취하여야할 것이다.



행위 구원론적 언약적 신율주의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였다는 언약적신율주의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언약적신율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시킨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시킨다는 개념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다.


언약적신율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며,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완성시키려고한다.


이들의 행위 구원론적 행태를 그리스도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리는 행태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도 아니며, 이들에게 아담의 타락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으며, 아담의 타락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암묵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가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삶의 본을 보여준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에, 언약적 신율주의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은 예수를 모셔내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이 따라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이 땅의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예수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드는 작업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부분이 없지만, 예수를 따름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인간의 자리로 모셔내림으로서, 인간의 공로가 들어설 수 있는 부분이 된다.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예수를 따름으로서 쌓으려는 공로는, 예수를 모셔내려 그 위에 올라서려는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가 없다.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외적인 선은 이 세상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일 뿐,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은 끝까지 자신에게서 의를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인간의 바램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예수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오직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변혁운동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방법 가운데 또 한가지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문화를 창조명령에 근거한 인간의 창조 행위로 보고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이 보는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들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명령에 근거한 문화변혁을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상위 개념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은,  통치명령이나 지배명령으로서, 아담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했지만, 실패한 아담의 역할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삼중직이 회복되었으며, 창세기 1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완성시키심으로서  성도에게 안식을 주셨지만,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성취하여야할 과업으로 다시 규정하고있다.


이들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또 하나의 유형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육신natural body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의 문화는 육신을 위한 문화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의 구조는 거룩하기에, 발전의 방향을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된 인간의 문화는 육신natural body을 위한 구조를 가지고있기에, 천상의 세계upper register와 공유될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을 위한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의 참된 신앙 생활은, 문화변혁운동보다는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인간의 기술 문명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동은 비단 기독교라는 옷을 입은 이들만의 행동 양식이 아니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인간의 기술 문명은 인간이 필요로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으며, 기술 문명은 끝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도화된다.


인간의 욕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심이 내면에 깔려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화려한 문명 기술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기에, 아무리 발전된 문명이라도 타락한 육신의 완성을 위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원시 사회에 비유를 하면서, 발전된 문명의 극치를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이다.


에덴은 원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하늘upper register과 교통이 가능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구현되었던 곳으로서, 타락하여 육신 안에 갇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문명의 발전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계시키려는 행위는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기만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행위이다.



자연법 앞에서 선 인간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려고했지만, 율법 앞에서 정죄받고 파멸과 심판 앞에 서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선 인간들은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의 의로움을 추구하며,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 승리를 외치려고하지만, 인간 사회의 종국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문명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하며,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고하지만, 그 종국은 하늘에서 추락한 사단과 같이 추락될 것이다.


추락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 놓여졌던 것과 같이, 추락한 현대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던지, 바깥에 있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마음과 입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자들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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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018. 12. 13. 14:48

교회의 부패와 인간의 죄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교회의 부패에 대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어왔던 문제이다.


최초로 교회를 만드신 예수님도 부패된 교회의 희생자이셨다.


최초로 부패한 교인은 가룟 유다였다.


교회의 부패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그 양상이 정도를 넘어서 보편성을 가진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은, 부패의 속도와 부패의 보편성과 교인 수의 급격한 감소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의 감소와 첨단문명의 발달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들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근원적인 문제가 교회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수 많은 개혁과 자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으로의 상황도 역시 점점 더 안좋아질 수 있고,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부패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고, 개혁을 외치기도하지만,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 부패의 현장이 바로 자신이 속해있는 현장이고, 바로 자신이 믿었던 이들 가운데 일어나고있으며, 심지어는 교회 개혁을 외쳤던 자기 자신이 부패의 현장 한 가운데 있기도한다는 사실이다.


이해하기 힘든 문제는, 꾸준하게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당사자가 바로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결과는 개혁의 주체들의 다툼과 분열이라는 결과를 보는 현실에 있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무리들 자신들이 다툼과 분열의 현장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교회 부패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는 왜 끊임없이 문제의 한 가운데 있어야하고,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사자마져도 문제의 주역의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교회의 부패에 대한 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은, 분명 그동안의 처방들이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수 많은 싸움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인식하거나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과 인간 스스로의 승리를 외치는 사건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패배하는 것으로서, 타락한 인간의 자존심은 자신의 패배를 용납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남에게 돌림으로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는 죄성을 가지고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용납이 안되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자기 완성을 위한 인간의 죄성은 교회에 모인 교인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상적인 접근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여야한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현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인간의 존재론적 죄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외면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선함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결과일 뿐이지,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인 이유는,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몸소 교회를 세우셨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기에 모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도는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체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속성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성도가 용서받은 것은 행위로서의 죄악 이전에 존대론적으로 죄인인 것레 대한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범죄를 하지 않아도 존재론적으로 죄인이기에 세례를 받아야하는 이유와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행위 이전에 존재론적인 현실이다.


성도는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은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심판에서 현재적으로 용서받은 의인이지만, 체질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되었다.


육신이 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고, 죄성을 가진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거듭나 새사람이 된 성도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성을 가진 육신의 소욕을 다스려야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악된 육신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의 새 몸을 입을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성도라 할지라도 다스려야할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된 죄인은, 죄성을 가진 육신을 다스리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


하지만 죄성은 가진 육신은 어느 정도의 환경만 조성이 된다면,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고간다.


성도가 되었다고 환경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수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며 존경받아왔던 목회자도 어느날 한순간에 성추행 문제로 순식간에 몰락하기도한다.


세습의 문제에 휘말린 대형교회 목사들의 타락도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법이 사회법 위에 있다는 말로서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바벨탑과 같은 건물을 지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짓된 포장을 하는 교회의 대형화는 인간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이들은, 겸손의 자리로 옮겨갈 적절한 시기를 놓침으로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락하는 것이다.


타락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였던 것이다.


부패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환경을 만든 이들 모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질하는 이도 그 자리에 서면 예외없이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은 다르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다.


손가락질하거나 고발하는 것으로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


이미 부패할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은 인간 모두가 직면하는 상황이다.


부정과 부패의 상황에서 할 일은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상황의 개선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인간이 투쟁하면서 나아지게하는 상황은 고무줄을 당기는 것 뿐이다.


고무줄은 상황만 주어지면 원위치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 대한 소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성도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육신의  소욕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윗의 눈물의 기도는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고통스러워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교회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이, 상황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한다.


교회는 성도에게 삶의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공급처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서 죄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곳이어야한다.


공예배에서의 설교 주제는 죄에 관한 것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복을 받는 복음이 아니라,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여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 만큼이나, 교회의 설교단에서는 죄에 관한 언급을 들어볼 수가 없다.


오히려 도덕적 선함을 드러내는 곳이 인기를 끌고있다.


유대인들의 도덕적 선함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다.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걱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십년간의 공예배에서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선포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죄에 대한 선포는 교인들을 떠나가게만들고, 교회는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대부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무덤에 들어가야한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 어느 누구나 다를 바가 없이 똑같다.


인간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어느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다.


육신에 대한 죄성을 인식할 때, 자신의 육신이 시험에 들지 않게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근신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했지만, 부패한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자연법 앞에 서있는 모든 인간은 다른 이들의 죄를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하지만, 모든 인간은 파멸의 길을 가면서 자연법 앞에서 죄인임이 증명될 뿐이다.


인간은 첨단 문명을 통해서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려고하지만,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죄성은 단순한 불순종의 죄성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든 진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완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한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교인은,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교회 생활을 하며,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교회에서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는,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유사한 모습을 나타내기도한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리세린에게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오셨지만, 자신들이 죄인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열심이었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교회에서 열심인 교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려고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의인이 되려는 열심에서부터 나온다.


자신의 의가 인정받지 못할 때는 파당을 짓고 분열에 앞장선다.


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함으로서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려고하지만, 정작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없다.



(나가는 말)


교인들과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하면, 대부분이 회피를 한다.


오히려 세상 이야기를 하면 즐겨듣는다.


설교에 의해서만 수동적으로 신앙이 자란 성도는, 엔진이 없는 끌려다니는 객차와 같다.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 않는다면, 결코 어떠한 대책도 세워질 수 없으며, 어떠한 희망도 바라볼 수가 없다.


평생 들어온 설교로만 성숙된 장로는 교인들을 대표할 능력이 없다.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의 설교는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없으며,  이러한 설교는 아무리들어도 희망이 없기에, 교인들 스스로가 변해야한다.


죄인식이 결여된 설교만 평생 들어온 교인은, 공급이 없으면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하는 영원한 프렌차이즈와 같다.


평생 프렌차이즈 사업만하여온 사람은 영원한 무능력자로만 남든 것이다.


진정 깨어있는 성도는 스스로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교리에 대하여도 스스로 책을 구입하고 공부하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여야하며, 스스로 말씀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나아가야하며,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한다.


목회자가 죄에 대한 언급을 하지않더라도 교리 공부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존재론적인 죄인인지에 대한 인식을 키워나아가야한다.


존재론적인 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한다.


다윗이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눈물로 기도를 하였듯이, 교회와 나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구해야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죄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한국 교회는 2007년에 다시 부흥을 시도하여했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하나의 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Again1907은 부흥만을 욕심낸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이벤트에 불과한 행사였다.


죄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기에, 이제는 성도들이 변해야한다.


모든 변화와 개혁은 교리의 가장 기초가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죄인식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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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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