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상황 2018. 10. 14. 13:04

비판과 공격에 대한 성도의 자세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삶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비판이나 공격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비난과 공격에 직면해야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멈추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살아도, 비난과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


비난과 공격에 직면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도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비난과 공격은 조그마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적인 재앙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띄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도는 비난과 공격에 대한 자신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하기에,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공격과 반응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은 책임을 물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 추궁이었지만, 아담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비난과 공격이었다.


아담은 책임을 아내에게 돌림으로서 아내를 비난하고 공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아내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을 하였다.


하와도 뱀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서 뱀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자기를 방어하였다.


아담이나 하와 모두 다 자신의 잘못과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신들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정당화시키려고만 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을 일삼았으며, 인류의 역사는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실례를 통한 적용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들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내뱉으며 비난과 공격을 일삼는다.


한국은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에 의해서 조선이 개방되고 발전되었다고 자신들을 미화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은 조선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민족이 아니라며 거침없이 한국에 대한 혐오감을 쏟아낸다.


일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기


비록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긴 했지만, 조선에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중일 전쟁에서 패한 중국을 의존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는 일제에서 피할 길이 선교사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중국이 잘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라.


악은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기도한다.


이조 500년의 유교적 배타성에 물든 조선은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토양이었다.


일제 36년은 뿌리 깊은 조선의 배타적 토양을 갈아엎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기적 결정에 의한 재앙이었지만, 피난민들의 이동으로 인하여 지역의 배타적 텃새를 없애주었다.


지금까지 전통과 배타성에 깊이 물들어있는 강릉과 경주, 그리고 제주가 끝까지 기독교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환경이나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같이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해주지 못한다.


가시와 엉겅퀴는 물론이고, 저주를 받아 손상된 땅으로 말미암은 화산과 지진은 물론이고,변화된 기상이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진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보다도 인간들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유혹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공격을 받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느 누구도 인간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공격을 받는 것은 사람 자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의 공격을 받았던 것은, 이방인들에게서 원인을 찾기 이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기에, 죄악된 인간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참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온전하게 보호해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성경의 인물들의 반응


(요셉)


요셉은 형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형들의 공격은 요셉의 길을 이끌었던 필요악들이었다.


팔려간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대신에 요셉 자신이 가지고있었던 교만은 다스림을 받을 수 있었다.


요셉이 받았던 비난과 공격은, 욥이 자신을 저주했던 것과 같이, 요셉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요셉은 역경의 과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망 가운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윗)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었지만, 이러한 축복 뒤에 그에게 다가온 환경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난 가운데서도 다윗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 다윗에게 허락된 육체적 소욕은 그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고난 가운데 성숙되었던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애통해 하였다.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악의 한 가운데서 받은 고난으로 인하여 구속자를 간절히 원하는 준비된 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과정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공격의 연속이었지만, 예수님의 대응은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간의 원론적인 죄성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궁극적 사역은 속죄 사역이었기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의 죄를 직접 담당하셨다.


(바울)


바울을 괴롭게 하였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육체의 가시였다.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지로서, 일종의 사탄의 공격이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이 언급한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자로서 바울을 괴롭게하는 도구로 사용되고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사탄과 싸우려고하지 않았다.


사탄은 분명한 악이었지만 이는 바울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성도의 자세


성도는 일단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공격을 수용하여야한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지 말고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여러가지 형태로 복수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괴물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도 괴물이 되기도 한다는 니체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도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종종 가해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하며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한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공격과 비난은 종종 성도를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셨듯이, 성도는 교만에 대한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비난과 공격이 허락되기도한다.


자신을 따르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공격하는 이를 공격한다면, 그는 더 이상 성도이기를 포기하고 교주의 길을 가려는 자이다.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맞받아 공격하는 이들은 결코 성화의 과정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비난과 공격이 올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이스라엘이 공격을 받았던 것이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이 공격을 받을 때는 외부의 문제보다는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아야한다.


인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다.


특히 페북에서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지고있는 자들은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칭찬에 익숙한 이들은 스스로 착각에 빠지면서, 자신이 근원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업적이나 자신에 대하여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을 수용하는데 인색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없는 훈계는 공격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죄인을 더욱 죄악 가운데로 몰아간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최상의 대처법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음을 보고서 자숙하는 것이다.


성도는 죄악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에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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