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저주 #축복 #에덴'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1.21 :: 하나님의 저주에 담겨있는 축복
부정적 상황 2020. 1. 21. 17:11

하나님의 저주에 담겨있는 축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저주로 보이는 현재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기 위해 준비되어지는 과정이다.

 

이번 글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비롯된 인생의 역경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한다.

 

인생의 현재적 삶은 과거와 동떨어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곳인데 인생의 삶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현재적 삶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담의 범죄와 에덴 바깥으로의 쫓겨남,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바벨론으로의 쫓겨남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면, 에덴의 바깥에서의 현재를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들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 바벨론에서의 삶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에덴의 바깥과 바벨론, 그리고 아담과 이스라엘의 유사성을 통해서, 에덴의 바깥 세상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벨론에서와 같은 삭막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경들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에덴의 바깥에서 살아가고있다.

 

인간은 개인이 죄를 저질러서 죄인이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처지와 매한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인간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신 것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면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 아래에 있다.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현재적 상황은 범죄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아담은 에덴의 풍요를 누리는 축복을 받도록 지어진 존재였다.

 

에덴의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되었다.

 

모든 인생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에덴의 동쪽 길까지 차단 당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야했다.

 

타락한 아담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땀을 흘린만큼 먹는 즐거움도 있으며, 인생의 수고의 결실로 인하여 풍요를 누리는 낙도 있다.

 

땅을 갈며 수고하여야만 결실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일까?

 

결코 아니다.

 

이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저주였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을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상황은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쫓겨난 상황으로 재연된 것이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잡혀갔었기에, 바벨론에서의 삶은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생들도 마찬가지로 사탄의 종노릇하며 전적으로 부패된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만약에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바벨론에서의 성공과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을 잊은 백성으로서 영원한 멸망이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현재의 삶에서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을 것이다.



풍요의 에덴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바벨론은 가나안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에덴의 바깥이 에덴 동산과 대조를 이루었던 것과 유형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있는 것과 같다.

 

에덴의 바깥은 아담을 유혹하였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가나안에서의 예루살렘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었지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집합체를 이룬 곳이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약속되었지만, 에덴 바깥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땅을 갈아야만 하는 곳이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는 곳이다.

 

바벨론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수고의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었지만 바벨론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 간신히 먹고 살 수있는 곳이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던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에덴 바깥에서 땅을 갈아야하는 삶을 재연한 것이었다.

 

바벨론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 세계의 환경을 대변해주고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곳곳에 성전이 세워졌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바벨론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다.



바벨론에서의 삶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유수는 절망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바벨론에서의 삶은 바벨론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에 대한 징계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삶이 되어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또한 바벨론에서의 삶은 자신들의 죄성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시간이되어야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땅을 갈며 가나안에서의 풍요를 그리워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시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만 했다.

 

다시 가나안에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했다.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다짐을 다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상처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되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미 기력이 쇠한 그들은 구원자의 도움을 간절히 갈망하고있었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투쟁도 해보았지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들과 불칼로 가로막혀있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유다 마카비우스의 혁명은 지금까지도    하누카로 기념되고 있지만 이러한 무력으로는 성전을 회복시킬 수도없으며, 인간의 노력에 의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여야만 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

 

인간이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상당부분에서 바벨론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바벨론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여야했던 세계였듯이, 에덴 바깥은 불순종한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경험하고있는 세상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인간들이 존재론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해주는 곳이었다.

 

에덴 바깥의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경험하게해주는 곳이다. 

 

문제의 핵심은 세상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성에 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풍요에 의해서는 죄를 깨닫을 수가 없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어려움과 고생 가운데서만 자신의 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에덴서 쫓겨난 아담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만 했듯이, 모든 인간의 수고는 불순종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강령이다.

 

비록 문명의 발전에 의해서 상공업이 발달되었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을 갈며 수고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지만 인간은 이를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불순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땅을 갈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의 길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명의 발전과 도시 문화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독립하고자하는 정신이 근원에 자리잡고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고자한다.

 

인간은 살기위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최선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최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망이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발전되어질 수도있다.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보다는 하나님없이 살아가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있다.

 

끊임없이 도망가고자하는 인간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를 구원하시고자 요나와 같은 어려움을 주시기도한다.



절망적인 환경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있다.

 

인간이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되는 절망들은 대부분 육신적인 절망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으시기에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과 같을 수가 없다.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삶은 이익이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자아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이익의 실현은 자신의 명예욕과 성공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키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어떠한 인생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을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죄인이다.

 

인간의 자아실현은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킨다.

 

특히 성공한 인생에서 자신의 죄성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내면에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한번쯤은 어느 순간에 심각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깊은 좌절감에 빠져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붙들기가 쉽지가 않다.

 

인생이 절망에 처해있는 상황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종종 인간 관계가 최악의 상황이 되기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있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오신 분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주님을 외면한 세상의 화평은 독이될 수 있다.

 

주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시기도한다.

 

사람들은 평화를 외치지만 하나님을 외면하는 평화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와의 전쟁, 자연 재해, 사회의 죄악, 인간의 질병등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결코 해결될 수 없지만 이러한 불행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있다.

 

표면적인 평화와 안정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에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삶이 평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제동이 걸릴 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고통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살아가야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의무는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깨져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면서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살아간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지만 인간은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로 드러날 때까지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고한다.

 

인간은 문제가 문제가 드러날 때까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 해결책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표면적인 해결은 근원적 문제를 외면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지속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고 살아간다면 이러한 상황 자체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 삶의 풍요로 인하여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밖으로 쫓아낸 아담에게 그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게하심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이는 인간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고생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일그러졌지만 그나마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형상이 남겨져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되어있으며, 영원한 것을 갈구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자한다면 인생의 절망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여야한다.

 

인간은 준비되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인간은 절망의 상황에 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로하여금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끔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면서 다가오신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땅을 가는 수고와 고통이 주어졌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함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

 

아담의 범죄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아담의 땅을 가는 수고는 바벨론에서 재연되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시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을 통하여 자신들이 근원적인 죄인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은 자신의 현재적 삶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교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생은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택함받은 이들은 자신의 교만함이 무너지는 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역경과 어려움, 극단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 우울증, 좌절감, 절망, 고통, 외로움….등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들이 예고도 없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덮치기도한다.

 

고통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고통의 시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의 시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한다.

 

심지어는 고통 자체가 너무 힘들어 목숨을 끊는 이들이 부럽기까지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시간에 가장 가깝게 다가오신다.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말씀 가운데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누구를 원망하기 이전이 자신이 그렇게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불행의 근원에는 자신의 교만이었으며, 이제껏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못 알고있었는지를 알게된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은 죽음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임을 새롭기 깨닫게 된다.

 

자신의 고통의 시간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시간이며 자신이 죽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결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에덴 바깥에서의 삶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태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태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바벨론에서의 삶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기다리는 삶이다.

 

바벨론은 변화되지 않고 멸망당했다.

 

이 세상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합된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기에, 성도는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때가 차면 성도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삶의 고통은 영원한 것을 위한 마중물과 같이 성도에게 필요한 과정이기에,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역경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