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단순한 느낌을 넘어서 허무감에 압도되어 침물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자신의 과도한 의욕과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좌절감에서 오는 허무감도 있겠지만, 적당한 의욕, 혹은 최소한의 권리마져도 빼앗긴 상태에서 엄습해오는 허무감은 감당하는 것 조차도 힘든 경우도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능력의 한계가 있기에, 자신이 감당할 능력을 넘어서는 짓누름은 인생을 깊은 좌절감으로 몰아가기도한다.
엄습해오는 허무감과 좌절은 우울증으로 이어지며, 의욕이 상실됨 삶은 끌고 가는 것 조차도 힘들어진다.
뜨거운 물에 눈이 녹듯이, 고통이라는 뜨거운 물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좌절의 심연을 빠뜨린다.
이전에 열심을 내었던 것들은 허무해지며, 과거의 추억들은 과거일뿐, 현재의 자신과는 관계없는 순간들로 기억된다.
친근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멀어져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리기도하고,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면서, 버려지는 자신을 경험하기도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버림받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무관심과 배반, 열심을 내었던 직장에서의 상실감등은 허무를 넘어 분노와 증오로 이어지기도한다.
분노와 증오는 자신을 움직이는 또 다른 삶의 동력이 되기도하지만, 왜곡된 동력은 또 다른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며 인생을 더욱 허무 속으로 몰아가기도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반전이 될 수 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지렛데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이 변화될 때 좌절과 고통이 또 다른 희망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광주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불행을 경험하면서, 마음 속 가득히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지만, 생각이 변하는 순간,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여지기 시작했으며,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더불어, 상실되었던 삶의 의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도하였다.
비록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삶은 허무와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인생은 분명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순간들
어느 순간부터 예전에 열심을 내었던 일들이나, 자주 만나 삶을 공유했던 이들이 잊혀지면서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허무감을 밀려오기도한다.
어린 추억이 담겨있던 집을 방문해보면, 옛 추억의 현장들은 변해있고, 옛 추억의 동창들을 만나보면,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변해있었다.
이와 더불어 예전의 삶을 기반으로 서있던 자신의 모습은 초라해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하더라도 아마 똑같은 삶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추억의 순간들은 사라졌지만, 추억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있고 미래의 삶이 존재한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순간 순간 사라지는 것들은 허무 할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순간은 영원한 것을 예표한다.
순간의 것들은 영원한 것을 구성하고, 예표하는 유형적 표상이다.
허무함으로 다가오는 육신의 연약함
인생의 허무함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다가 온다.
육신이 강건할 때 영원한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않고,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얻기 원한다.
육신의 연약함은 현재적 삶에 대한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기력이 쇠하기에 의욕은 상실되고, 예전과 같지 않은 몸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바라보며, 세상에서의 의욕보다는 활발했던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를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만나는 이들보다는 이별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며, 자신마져도 옛 추억들을 가슴에 간직하고서 이 땅과의 이별을 준비하게된다.
인생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이 땅과 이별해야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허무한 삶을 이루어 나가지만, 궁극적으로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생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감될 때 더 이상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죽음 후의 삶이 허락된다하더라도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 이루어내었던 것이 천국에서의 삶에 영원히 보존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삶이 허무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없다.
의지할 대상이 아닌 인생들
삶 가운데 만나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귀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은 무력해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타락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육신이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땅에서 의지할 대상들을 만들어간다.
의지할 대상은 어느덧 자신의 우상이 되어버린다.
교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없다.
교회가 의지할 대상이 될 때 교회의 목사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며, 우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교회가 섬김의 대상이 될 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신앙 생활이 자칫 우상을 숭배하는 생활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우상이 되어버린 목사는 탈선할 수밖에 없으며, 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은 허무함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교회를 의지할 때, 삶의 활력이 되어야할 교회 생활이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버리기도한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생명되신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이 세상의 것들을 쫓아가는 육신이 되었다.
허무함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가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죽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시면서 또 거두어 가시는가?
세상적 관점에서본다면, 인생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허무한 삶일 뿐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을 살아갈 힘이 주어진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불행이 없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배제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만 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한 존재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에게는 스스로 삶의 활력을 느끼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활력과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육신을 위한 삶은 자기 만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육체를 위한 삶이 동력이된 인간에게 더 이상 자기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인간에게 있어서, 동력은 오직 육신의 소욕을 위한 것이다.
욱신의 소욕으로 축적된 재물로는 결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
성공한 인생이든, 실패한 인생이든 허무로 귀결되는 것은 한 가지이다.
하지만 성공한 인생은 자기 만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실패한 인생은 그 고통이 하나님을 찾는 동력이 되어, 생명에 이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실한 마음과 삶의 고통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도록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허무함과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환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외부의 강압적인 환경이 없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수가 없다.
아담이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다함은, 그 육신의 소욕에 종속되어, 하나님 대신에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인간의 육신의 삶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가나안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풍요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은 애굽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잊어 버렸을 것이다.
애굽에서의 풍요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인생을 영원한 음부로 이끌뿐이다.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와 고통은 인생에 생명이 없음을 인식하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몸에 문제가 있어도 고통이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치료의 기회를 놓쳐버릴수밖에 없다.
의사는 아무 불편을 호소하지 않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지 않는 인생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으신다.
고통과 허무함으로 인한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영원한 것만이 고통과 허무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쁨은 허무함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자의 밥이 되며 죽어가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전의 삶에 대한 허무함보다는 앞으로 경험하게될 새로운 인생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서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허락되었기에,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며, 영원한 삶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된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 자체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외롭고 힘들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행동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같이, 이 세상의 고통이 나를 집어 삼키려할지라도, 오직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인간이 옆에 있는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척이나 힘들 때일수록 기도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준다,
힘든 인생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기에, 성도는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 타락한 아담이 원망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무력하셔서 아담의 범죄를 막지 못하셨는가?
아니면 마치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의 함정 단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목격하시고도 징계를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방치하셨는가?
이 두 가지 다 결코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의 인격체이다.
아담의 인격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다.
아담의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참된 인격체는 자신이 결정한 행동 방식이 존중받을 때 참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선택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세우심으로서, 창세 전 미리 택정한 자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인생은 택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의 고통을 통하여 출애굽으로 이어졌듯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삶 가운데서의 고통을 통하여, 택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것들을 위한 순간들
순간의 시간들이 없다면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가 없다.
비록 창조 세계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많은 부분 파괴되고 변질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결코 허무하게 무너진 세계가 아니다.
순간이 영원이 되고 허무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바뀌고 고통이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다.
땅에서의 것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이 인생의 구원과 천국을 예비하는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이 될 수 있다.
인생의 과정들은 땅에서의 순간들이 영원으로 열매맺는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죽어있는 삶에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존재이며, 인생은 죽어가는 것 같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명력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인간은 허무함과 고통으로 뒤덮이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을 수가 없다.
삶은 살아있는 인생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적으로 죽어있는 인생들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복음을 받기 전에는 실상은 죽은 자였었다고 말한다.
인생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다.
인생은 생명을 제공받을 수 있는 그루터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생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 땅에서의 인생이 없었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인생을 알게되고 영생을 알게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지를 알게된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풍성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한다.
다양한 과실들과 자연의 오묘함과 광대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
이 땅에서의 경험은 영원한 것의 유형적 표상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을 예표하고 경험하는 삶이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다양성에는 영원한 실상의 유형적 모형들이 담겨있다.
인생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통해서 처음 창조시의 영적인 몸을 그려볼 수가 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예표하였으며, 이 땅에서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인생의 삶에 생명을 예표하는 모형과 그림자가 없다면,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이 허무함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것들 조차도 시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성도의 삶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교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함과 좌절과 우울증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없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복된 삶
만약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오직 창조주이실 뿐 구속주는 아니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알 수 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측정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나타날 수 있었듯이,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행과 고통과 허무감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할 수 있다.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생들이 있었기에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으로서의 혼인을 위한 것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인생은, 이 땅에서의 삶을 허무로 마감하여야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는 복된 삶이다.
대통령도 아닌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연합된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어찌 복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인생
이 땅에서의 인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인간 자신은 자기의 길을 계획하지만 이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주관하시면서 이루시는 일들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손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땅의 인생들은 결코 무의미한 인생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때가되면 추수를 하실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은 추수할 결실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없었으면, 하나님께서 추수할 결실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이 땅을 창조하시고서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에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신 것이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허무한데 굴복하였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듬뿍 나타내심으로서, 자신의 창조를 사랑으로 새롭게 다듬어 가신다.
인생 가운데 경험되어지는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과 허무등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기회를 제공해준다.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하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결실의 원동력이기에, 그 안에 담겨진 보화가 발견되어져야하는 시간들이다.
자연법에 묶인 인생
사랑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을 근거로 창조 원리를 설명하려고하지만, 과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다.
과학은 무에서의 창조를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시다.
과학으로는 부활을 설명할 수가 없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자연 과학에 대한 승리이다.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와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아담은, 타락과 더불어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초월적 세계가 상실된 자연법에 묶이게 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에게는 오직 저주만 있었듯이, 자연법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오직 심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생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육신이 되었기에, 육신이 된 인생은 타락 이전에 아담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 수사 없게되었다.
과학으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설명되어질 수가 없다.
과학으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설명되어 질 수가 없다.
과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지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의 인생은 과학이라는 자연법을 초월한다.
과학이라는 자연법에 묶여있는 인생은 늙고 쇠약해지면서, 허무감에 무너져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생명을 얻은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참여되어지는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인생은 허무함에 무너져내리는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인생이기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을 감쌀지라도, 성도는 자신 안에서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여야만 한다.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는 순간들
신약이 없는 구약은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희망의 빛을 상실하였다.
구약만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으로 시작하여 육신으로 끝나는 인생은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가나안 땅이 없었다면 영원한 천국을 소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영원한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이 없는 신약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신약은 구약을 근거로 존재한다.
욕심과 낙망과 좌절과 죽음이 없이는 영원한 삶을 소망할 수가 없다.
순간은 영원의 근거가 된다.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안에 생명을 품을 수 있다.
현상 가운데 담겨있는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다.
현상만을 쫓아가는 세상에서의 성공은 피상적인 것일 뿐, 그 안에는 썩을 것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세강에서 아무리 성공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것을 품을 수 없고,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생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문명의 발전은 허무함이 원동력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함에 굴복하는 인생에게 생명를 주시고자하지만, 인간들은 문명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해보려고한다.
문명 기술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현상만을 쫓아갈뿐 그 안에 담겨있는 실체를 극복하지 못한체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고통의 실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지만, 현상만을 쫓아가는 문명의 기술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인간 스스로의 힘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문명 기술 안에서 소망을 품을수록,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은 줄어들 뿐이다.
문명의 기술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들을 제거해나간다.
첨단 과학으로 표현되는 현대 문명의 현상들은, 이전의 것들을 비문명적이고 구식으로서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첨단 문명이라는 기술은 현재성의 근거가 되는 기준들을 제거해버린다.
현재의 첨단 기술은 어느 순간엔가는 구시대의 산물로 바뀌어 버린다.
현재의 기술에 의존하였던 인생들은 어느 순간엔가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있게 된다.
기술 문명에 의지한 인생들은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술 문명 사회에서는 노인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기술 사회에서 권위는 허상일 뿐이다.
어른은 결코 권위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첨단에 앞장서는 젊은이만이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것만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문명 기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사조의 표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 자리잡을 곳이 없다.
문명 사회의 결핍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결핍으로부터 기인되지만, 문명 기술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기회를 막아버린다.
발전되어지는 문명 기술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형성을 찾아보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신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에덴을 덜 발달된 원시적인 곳으로 묘사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육신의 것으로 대체해버린다.
기술의 발전은 아담 안에서 반역한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개벽이라는 뜻을 지낸, 인류 최초의 도시인, 에녹이라는 성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도시 문명과 함께 고도화되는 기술은, 하나님께 얼굴을 붉힌 가인의 정신을 어이받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기술일 뿐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더 들어설 자리가 상실되어갈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척이나 멀어져간 인간들을 더 이상 놓아둘 경우 이 땅은 완전한 지옥이 될 수밖에 없기에,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말씀에 비추어 시대를 분별하여 보면, 무척이나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이다.
현 시대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기술의 문명에 의지하여, 거짓 것에 희망을 가지고 유혹을 쫓아가는 시대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
마지막 때에는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심판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짓된 유혹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상실된 기술 사회는 불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육신을 쫓아가는 인간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고도화되어가는 첨단 기술이 주는 유혹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은 그 속성상 영적인 몸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첨단 기술은 육체가 된 인간의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을 극대화하는 기술 문명에 빠진 인간들의 삶은 허무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은 오직 피에만 있다.
피가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일 뿐이다.
육신의 소욕으로 얻은 자기 만족에는 생명이 없다.
자기 만족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인간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왜곡시킬 뿐이다.
첨단 기술은 인간을 빨아들이는 매력을 가지고있지만, 그 가운데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으며, 허무만을 남길 뿐이다.
현대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평안과 행복은 생체 호르몬을 순화시켜서 더욱 삶의 의욕을 주시만, 첨단 기술은 그 특성상 인간의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만을 자극시켜서 인간을 흥분시킬 뿐이다.
공급이 없는 소비만 촉진 시킬 뿐이다.
허무함과 우울증은 공급이 없는 소비의 당연한 결과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손길이 내미셨듯이, 허무함과 우울증이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허무함과 우울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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