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범죄와 하나님의 고통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야만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부 가운데 한쪽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최초의 부자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최초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으며, 창세 이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선택한 인류 최초의 이별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할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인물이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비록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었지만, 육신이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하심으로, 천상의 세계가 인간과 함께 공존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한 인격적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었다.
인격적 존재의 자유로운 선택은 존중되어져야만 했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면, 아담의 인격적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되며,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아담의 범죄가 예정된 것이었다면, 아담의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이 뒤따르게되며, 아담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선악과 범죄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되시기에,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인격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전적인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행위이며,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과 같은, 일종의 반역 행위인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마땅히 창조 세계의 기준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세계의 운행 원리가 되어야만 했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인 인간의 기준이 되실 수가 없으며, 진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반역행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단순한 헤어짐이나 분리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집을 나간다면, 부모의 심적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이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최초의 행위였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께 이별을 통보한 것이며, 이별을 통보받은 하나님의 마음의 찢어짐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고통을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별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무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인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왕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추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추락한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은 단순한 연민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상실이 수반된 고통이다.
사람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신 이별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가 없다.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이별의 고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은, 이미 아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고통의 표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 세계의 실패를 그냥 수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적인 능력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인격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덮으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모든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주시고, 다시는 사망으로 인한 헤어짐이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심은, 이별의 고통을 참으실 수가 없으셔서, 나락으로 추락한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택함받은 자의 눈물을 씻기우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희생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삶 가운데 겪는 모든 이별의 고통과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과 부활하심은, 인간이 겪는 이별의 고통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해입히셨듯이, 이별은 사람이 먼저 선택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피해자이셨지만, 하나님은 정죄하시기에 앞서서, 벌거벗은 인간을 사랑으로 덧입히신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의 근원에는 아담의 범죄가 자리잡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모든 이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 해결을 맛볼 수 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소망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마치 집을 떠난 자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부모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게되는 다양한 이별에 대한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아들의 위치를 방각하고 이미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먼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위치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범죄는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였으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상처를 받으신 분이시다.
삶 가운데 서로를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께 준 상처를 재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밖에 없다.
자녀를 키우면서 겪게되는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아담 안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람을 사랑 할 능력이 없다.
그나마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그러진 일부분일 뿐이다.
자녀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고통은, 원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져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상실되어가고있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모든 고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겪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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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공격에 대한 성도의 자세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삶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비판이나 공격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비난과 공격에 직면해야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멈추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살아도, 비난과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
비난과 공격에 직면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도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비난과 공격은 조그마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적인 재앙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띄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도는 비난과 공격에 대한 자신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하기에,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난과 공격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공격과 반응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은 책임을 물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 추궁이었지만, 아담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비난과 공격이었다.
아담은 책임을 아내에게 돌림으로서 아내를 비난하고 공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아내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을 하였다.
하와도 뱀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서 뱀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자기를 방어하였다.
아담이나 하와 모두 다 자신의 잘못과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신들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정당화시키려고만 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을 일삼았으며, 인류의 역사는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실례를 통한 적용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들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내뱉으며 비난과 공격을 일삼는다.
한국은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에 의해서 조선이 개방되고 발전되었다고 자신들을 미화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은 조선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민족이 아니라며 거침없이 한국에 대한 혐오감을 쏟아낸다.
일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기
비록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긴 했지만, 조선에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중일 전쟁에서 패한 중국을 의존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는 일제에서 피할 길이 선교사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중국이 잘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라.
악은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기도한다.
이조 500년의 유교적 배타성에 물든 조선은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토양이었다.
일제 36년은 뿌리 깊은 조선의 배타적 토양을 갈아엎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기적 결정에 의한 재앙이었지만, 피난민들의 이동으로 인하여 지역의 배타적 텃새를 없애주었다.
지금까지 전통과 배타성에 깊이 물들어있는 강릉과 경주, 그리고 제주가 끝까지 기독교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환경이나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같이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해주지 못한다.
가시와 엉겅퀴는 물론이고, 저주를 받아 손상된 땅으로 말미암은 화산과 지진은 물론이고,변화된 기상이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진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보다도 인간들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유혹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공격을 받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느 누구도 인간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공격을 받는 것은 사람 자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의 공격을 받았던 것은, 이방인들에게서 원인을 찾기 이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기에, 죄악된 인간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참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온전하게 보호해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성경의 인물들의 반응
(요셉)
요셉은 형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형들의 공격은 요셉의 길을 이끌었던 필요악들이었다.
팔려간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대신에 요셉 자신이 가지고있었던 교만은 다스림을 받을 수 있었다.
요셉이 받았던 비난과 공격은, 욥이 자신을 저주했던 것과 같이, 요셉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요셉은 역경의 과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망 가운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윗)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었지만, 이러한 축복 뒤에 그에게 다가온 환경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난 가운데서도 다윗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 다윗에게 허락된 육체적 소욕은 그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고난 가운데 성숙되었던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애통해 하였다.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악의 한 가운데서 받은 고난으로 인하여 구속자를 간절히 원하는 준비된 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과정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공격의 연속이었지만, 예수님의 대응은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간의 원론적인 죄성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궁극적 사역은 속죄 사역이었기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의 죄를 직접 담당하셨다.
(바울)
바울을 괴롭게 하였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육체의 가시였다.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지로서, 일종의 사탄의 공격이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이 언급한 육체의 가시는 사탄의 사자로서 바울을 괴롭게하는 도구로 사용되고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사탄과 싸우려고하지 않았다.
사탄은 분명한 악이었지만 이는 바울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성도의 자세
성도는 일단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공격을 수용하여야한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지 말고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여러가지 형태로 복수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괴물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도 괴물이 되기도 한다는 니체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도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종종 가해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하며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한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공격과 비난은 종종 성도를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셨듯이, 성도는 교만에 대한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비난과 공격이 허락되기도한다.
자신을 따르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공격하는 이를 공격한다면, 그는 더 이상 성도이기를 포기하고 교주의 길을 가려는 자이다.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맞받아 공격하는 이들은 결코 성화의 과정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비난과 공격이 올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이스라엘이 공격을 받았던 것이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이 공격을 받을 때는 외부의 문제보다는 일차적으로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아야한다.
인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다.
특히 페북에서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지고있는 자들은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칭찬에 익숙한 이들은 스스로 착각에 빠지면서, 자신이 근원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많은 친구와 팔로워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업적이나 자신에 대하여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을 수용하는데 인색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없는 훈계는 공격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죄인을 더욱 죄악 가운데로 몰아간다.
비난과 공격에 대한 최상의 대처법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음을 보고서 자숙하는 것이다.
성도는 죄악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에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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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과 불완전성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창조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하는 목적은, 아담의 범죄가 창조된 아담의 미성숙함이라는 원인을 주장하는 이들과, 에덴이라는 환경의 불완전성이 아담의 타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들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기에, 짧막하게나마 이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생각들을 정리해보고자한다.
현대는 여러면에서 발전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사고의 발전 못지 않게, 과학적 학문과 기술도 발전되어있다.
현대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거는 발전이 될 된 미성숙한 사회였으며, 고대 사회는 원시 사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과거로 갈 수록 기술이 덜 발달된 구석기 시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은 구석기 시대였으며, 아담은 원시인이었을까?
발전이라는 용어는 창조된 인간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미완성과 불완전함을 전제로하고있다.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기술적 개념이다.
철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경험론적 합리주의에 근거한 현대철학은 이성을 중심으로하는 헬라 철학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험적 합리주의에 합류한 현대신학도 발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을 배제한 경험적 합리주의는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성에 대하여 혼란을 겪게된다.
신학은 계시를 근거로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과학적 경험주의에서 점점 더 설 자리를 상실해 가고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역사를 수 억년까지 연장시키면서, 우주의 탄생을 빅뱅의 원리와 접목시키고있다.
이러한 양상은 계시의 과학성이라는 해결될 수 없는 주제를 도출시킨다.
창세기에 서술된 창조 기사라는 계시를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는 수 많은 논제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경험적 합리주의라는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은 지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미개한 원시인으로 창조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지식이나 기술의 발전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되기에, 경험되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존재들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의 발전은 표상적 도출일 뿐 인간의 존재론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며, 영적인 발전도 아니다.
과학은 단지 인간의 외적인 삶을 풍요하게해주는 수단일 뿐이며, 경험되어지는 세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수단일 뿐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붕괴는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붕괴이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과학 기술 세계에서의 인간 사이에는 연결될 수 없는 커다란 단절이 있다.
육적인 인간이 사용하는 과학 기술은 영적인 세계까지 이어지지 못하기에, 아무리 발달된 과학이라도 에덴에서의 아담까지를 이어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였던 영적인 존재가, 하나님을 피하고 외면하는 육적인 존재로 변한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육신이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았지만, 타락 이후에는 육신이 영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담의 벗었음은 영적인 아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타락한 이후에는 벗은 육신의 지배를 받아 수치를 가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의 발전은 수치를 가리고, 육신만을 풍요롭게하고자하는,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육적인 것에 제한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발전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육신에 제한된 관점에서의 발전이기에,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육신의 관점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교만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였는가?
인간은 누구나 종종 이전의 것은 발전이 덜된 구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일 뿐이다.
기술의 역사는 최초의 도시인 에녹성을 지은 가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술은 에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기술에 의존하는 육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기술은 타락과 더불어 육적인 존재가 된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영적인 세계를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첨단 과학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는 육적인 재능의 표출일 뿐이며, 타락한 인간의 육적인 소욕을 채워줄 뿐이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었기에, 기술의 발전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타락 이전의 에덴은 발전과 무관하며, 발전을 필요로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였다.
발전의 개념을 에덴까지 적용하는 것은, 에덴을 육적인 곳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며, 불완전한 미완성의 세계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타락이 아담의 불완전성이나 미성숙에 의한 타락이었다면, 창조주는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에 대한 책임감에 기인한 것이 된다.
창조의 불완전성에 의한 타락에서의 구속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다.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타락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어야한다.
만약에 인간의 타락이 창세 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정된 것이라면, 타락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아담의 창조가 불완전한 미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책임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섭리로 하나님께 원인을 둔다면, 인간은 타락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시며, 아담의 범죄는 인간에게 부여된 존중받아야 할 자유 의지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투영된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자유 의지를 가진 완전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수명이 크게 단축이 된 것은 자율적 결정에 의한 악을 제어함으로서 창조 세계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선악과 범죄는 더 이상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사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인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학 기술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이,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개발하고 발전시킨 기술들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기술을 부여시키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신학을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분석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오류라는 낙인을 찍고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존재였기에, 완전한 창조 세계를 온전하게 보존 할 수 있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창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관계로 인하여, 여러가지의 한계 안에 갇힐 수 밖에 없게되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육신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주관하던 피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존재로서,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파괴의 주체가 되었다.
처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발전을 필요로하였던, 미완성의 미개한 원시 세계가 아니라, 아담이 가졌던 자유 의지의 완전성 만큼이나, 오히려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하나님은 완전한 피조계를 창조하셨다
창조된 아담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피조 세계는 아담의 창조의 완전성만큼이나 완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실만큼 피조 세계는 완전히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에는 아담도 포함되어있었다.
피조계가 혼돈과 무질서에서 점진적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되어야만 하는 원시 세계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심히 좋았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의 급속한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실 만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처음은 완전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서로 교통이 되었던 거룩한 곳이었다.
순종은 피조 세계가 천상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조건이었다.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거룩한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천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지상의 세계lower-register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지상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만큼이나 거룩하고 완전한 곳이었다.
지상의 세계는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아담이 지배하던 피조세계의 불순종으로 확대되었으며, 타락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한 인간이 지배하는 피조 세계는 혼돈과 탄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는 자의 불순종은 환경의 파괴를 가져왔다.
지진과 화산 폭발과 환경의 재앙은 거룩함이 상실된 땅의 붕괴된 모습의 한 단면일 뿐이다.
완전했던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타락에 비례하여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하여 스스로 독립적인 길을 걸어야만 했다.
현재의 문명화된 도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개벽을 의미하는 에녹에서 부터 출발된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성을 하나님과 분리된 에녹이라고 지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까지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음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분리되기를 원했다.
현대 도시 문명은 에녹의 결실이었으며, 외적인 화려함 만큼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처음 창조 세계의 모습을 파괴시키고, 육신이 된 인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있다.
과학적 사고의 한계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천상의 영역과의 교통이 단절된 인간은 지상의 영역의 한계내에서만 사고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졌지만, 인간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있지만, 인간은 과학과 이성의 한계로 인하여 이를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가 없다.
성경이 과학적 사고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신학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성경을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이야기로 접근해보려고하지만, 이는 사람을 해부하여 생명과 영혼에 대하여 분석해보려는 방법과 한 가지 일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인간의 지적인 이해 방식의 연장선에 있을 수가 없다.
창조 과학자들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려고하지만, 이는 성경이 많은 부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과학적 사고는 천상의 영역과 분리되어 지상의 영역에 갇힌 타락한 인간의 사고 체계일 뿐이다.
천상의 세계가 감추어져있는 만큼, 처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계시는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성경 말씀은 오직 믿음 안에서 성령이 증거하실 뿐이다.
수 천년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서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창조를 증명해내지도 못했다.
말씀이 없는 자연신학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 설명될 수가 없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에서 유로의 변화 뿐이다.
창조는 무에서 (ex nihilo) 유로의 창조여야만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창조가 아니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비과학적 주장 가운데 한 가지는 원소의 변이이다.
원소는 고유한 성질을 갖는 원자로 구성되어있어 변이가 일어날 수가 없다.
진화론으로는 물질을 구성하는 103개의 원소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또한 진화론은,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의 법칙을 어기고, 획득 형질에 근거한 변이를 말하는 비과학적인 논리를 근거로 하고있다.
과학을 말하는 진화론의 논리는 가장 비과학적인 논리이기에, 하나의 이론일 뿐 과학적 사고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과학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시간과 빅뱅을 말하는 과학까지도 포함되어있기에 창조된 과학으로 창조를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철학과 과학의 한계 안에서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까지 포함되어있다.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하다.
창조된 인간은 공동체적으로 무리를 이루면서 살기에, 공동체적 삶의 흔적만이 연대를 증명해줄 뿐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문명의 유적은 성경의 증거와같이, 수천년에 한정되어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를 통해서 뿐이다.
말씀에 대한 이해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만약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인간이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면, 하나님의 탄생의 시간에 대하여 어떻게 결론을 내릴 지 궁금하기만 하다.
가리워진 천상의 세계
천상의 영역이 가리워진 상태에서 인간의 과학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였다면, 오병이어에 나누어진 떡과 물고기는 어떻게 추수되어진 것이고, 어떻게 잡은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추수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물고기를 잡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시간을 부여하여 지구의 탄생을 수 억년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에 갇힌 육신이 된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전의 존재 형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있다.
아무리 해부학이 발달되어도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있었는지, 성령의 내주하심은 어떠한 형태였는지 알수있는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간섭하심은 과학적으로 발견될 수가 없다.
진리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인 것과 같이, 진리가 과학으로 발견되어질 수 있다면, 진리는 더 이상 감추어진 보화가 될 수가 없다.
진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으며, 믿음은 성령의 간섭하심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지식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육신이 되기 이전에 공유되었던 천상의 세계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면서,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땅의 처음 시작과 마지막은 천상의 세계와 공유되는 형태이지만, 과학은 이를 증명 할 수가 없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천상의 세계가 없다고한다면, 하나님과 천사들도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존재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거나,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수정하려고해서는 안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도 아니다.
혼돈과 무질서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인해서, 완성된 창조 세계가 탄생된 것이었다.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구조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믿음은 육신이 된 인간에게 부여된, 천상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다.
말씀은, 과학과 이성의 한계로 인해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믿음이 없이 성경을 대한다면, 천상의 세계를 알 수가 없을 뿐더러, 피조계를 보는 한계 안에 갇히게 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이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신념일 뿐이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과 함께 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다.
타락 후에 육신이 된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기에 더 이상 천상의 세계를 함께 공유할 수가 없었다.
가리워진 천상의 세계는 과학적 인간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며, 인간은 지상 세계의 과학에 갇혀서, 과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죽음에 갇히게 된 것이다.
문화명령과 창조명령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의 발전을 결합시킨, 창조 명령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창조명령이라는 개념은,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을 대표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의 기본 개념이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리키는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이라는 개념은, 흔히들 말하는 문화명령과 유사한 개념이다.
창조명령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으로서,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연장선에서 행하여지는 행위로서, 이는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라는 것이다.
창조명령의 배경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종말에 완성될 미완성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미완성과 완성의 사이에는 문화와 기술이 채워지는 것이다.
알버트가 창조명령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하며, 에덴을 발전이 되지 않은 원시 사회로 본다.
알버트는 인간의 문명의 발전을 창조적 발전, 즉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봄으로서, 태초의 미성숙한 원시 세계를 인간의 창조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알버트가 가리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창조명령에 근거한 문화 활동을 기반으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을 통해서, 인간의 발전된 문화가 천국 문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이 문명의 발전의 구조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수정하여, 천국에 보존될 올바른 방향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가야한다는 것이다.
발전과 문화물의 천국보존의 개념에는, 에덴의 성전으로서의 기능과, 아담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배제되어있다.
문화명령, 혹은 창조명령의 개념은,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통치명령(창1:28)을 완성시키셨다고 보지 않는다.
창조명령, 혹은 문화명령의 개념에는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에덴에서의 목적은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사역은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시키시고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창세기 1장 28절(창조명령, 문화명령, 통치명령)을 타락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한 문화 명령으로 규정하고서,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의 문화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을 다시 시작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 28절은 아담의 3중직이 표현된 통치명령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명령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신 이러한 명령을 다시 실행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에덴은 문화명령을 통해서 발전되어야할, 인간적 개념의 미성숙과 미완성의 세계가 아니었다.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은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인격적 자유 의지를 지니고, 하나님의 영과 함께한, 흙으로 지음받은 완전한 영적인 존재였다.
에덴이라는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에덴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단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이었으며, 완전한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적 발전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에덴의 영적 속성을 제거하고 육적인 개념에서만 출발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 세계의 육적인 한계 안에 갇혀있다.
피조 세계의 육적인 한계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어떠한 인간적 노력과 과학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타락 이전의 에덴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불가능하다.
이성의 한계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자연신학의 한계 안에서의 신인식에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결론
발전이라는 개념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불완전성을 말함으로서, 아담의 범죄에 하나님께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으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발전의 개념은 자칫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원과 은혜의 속성을 바꾸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자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먹었다고 말함으로서, 책임을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있다.
발전이라는 개념에는 아담의 타락의 원인에 하나님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창조 원인이 있었다는, 책임 회피적인 성격이 담겨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는 어떠한 환경적 핑계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아담의 범죄는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원시적 형태와 미완성을 주장하면서, 마땅히 구원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창조적 발전이라는 개념은 에덴의 본래의 목적이나 특성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락한 인간의 육적인 발상일 뿐이다.
불완전성은 오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만 생각되어져야한다.
에덴은 자유 의지가 있는 완전한 세계였으며, 하나님의 영이 아담과 함께 한 곳이었지만, 피조물의 순종이 요구되는 불완전한 하나님 나라였다.
불완전성은 오직 인간의 의지적 불순종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인간이 불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에는 존중되어져야만 하는 자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시고 이를 막으셨다면, 아담의 자유 의지는 존중되어지는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자유 의지는 존중되어져야만 하고, 대신에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에덴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있던 아담에게 요구되어졌던 것은, 선악과 금령 뿐만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에서와 같이 통치 명령이 추가되었다.
통치 명령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확장이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불순종한 인간만을 낳을 뿐이다.
통치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아담의 3중직은 그리스도의 3중직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아담은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로서,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관리하는 자였다.
에덴이 성전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피조 세계가 에덴보다 나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만 에덴보다 나아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에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에덴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에덴에서 목표로하였던,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임한, 완성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면 안 된다.
칼 바르트는 창조 역사를 인간의 역사(Historie)와 구분되는 원역사(Urgeschichte)로 규정하지만, 이 또한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다.
원역사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실존주의적 인식의 틀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배제하는 인간적인 방법에서 나온 대안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아담과 더불어 창조된 피조계는 완전한 세계였으며, 인간의 발전은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하였던 창조 세계를 파괴시키는 역방향으로의 발전이다.
아담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적 존재였기에,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였던 아담의 범죄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선악을 결정하는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로 함으로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었다.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발달된 인간 문명의 종착지이나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각자의 판단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더 이상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도 아니며, 말씀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판단의 기준이라는 관점에서본다면,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발전이 아니라, 가장 붕괴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의 기준이시며,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만이 진리가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일 때,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