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하나님의 형상 2018. 2. 1. 17:41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재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규정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간에 인격적 관계가 요구되는 가운데 사회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과의 긴장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인격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 안에 담겨있는 인격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인격체persona로서는 세 분이시지만 본질substantia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 분 하나님의 공동체적 인격이 내포되어있다.


세분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세 분을 하나의 본질로 연합하여 일체를 형성한다.


인간의 인격을 통한 공동체적 관계성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통한 연합체를 결성한다.


인간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져있는 인격의 표현에서 나온 것이며, 이상적인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구현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아담의 범죄와 손상된 인격


아담의 불순종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파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조물로서의 아담 안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규명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공동체적 관계성을 유지해주었지만, 불순종에 의한 관계성의 파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손상을 가져왔다.


삼위 하나님의 서로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피조물인 아담에게는 순종으로 요구되었으며,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방법이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되는 법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관계성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상실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관계성의 파괴는 인간이 지니고있던 인격의 손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존중해주는 인격의 손상을 가져왔다.


인간 안에 담겨있던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손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으로 존중받던 인간이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단의 종으로 바뀌었다.


자녀와 종의 차이는 인격이 유지 되는 관계냐 아니면 상실 된 관계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사단의 종이되었기에 그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인격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삼위 하나님의 위격이 존중받듯이, 존중을 받을 수는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하고자 할 때 즉시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아담과 이브는 존중받는 인격체였기에 선택에 대해서도 존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타락 이후의 비인격적 사건들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역사는 인격이 상실된 인간들이 어떠한지를 고발하는 역사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해서 살겠다는 표시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개벽이라는 뜻의 에녹성을 쌓고서 아들의 이름도 에녹이라고 지었다.


인간 스스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관계성의 파괴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도시 문명이 발달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들은, 모든 신들의 출발지로서, 우상 숭배와 더불어 시작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유래된 각종 신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타락한 인간을 더욱 더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래된 신들로 만연한 가나안의 우상들과의 싸움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체와 가나안의 비인격체와의 싸움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격적으로 대하셨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 안에서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던 인간이 얼마나 비인격적이 되었는지를 고발하는 역사였다.



비인격적인 현대 도시 문화


최초의 도시는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이었으며, 도시의 성격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도시에서는 도시의 특성상 서로에게서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도시가, 자연을 의지하는 농촌과는 달리, 경제 원리로 운영되기에, 도시 구성원은 서로에 대한 필요 관계로 구성될 수 밖에 없다.


현대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상이 돈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현대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확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도시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도시의 보편화는 그나마 인간 안에 남아있던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더욱 비인격적으로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는 것은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일그러진 형상이 더욱 일그러져 사랑을 주고 받을 만한 인격적 요소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담 안에서 비인격적 존재이로 남아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된 존재이다.


마치 수술 받은 환자가 재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이, 성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나아간다.


성도 안에서의 인격의 회복은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주 하시는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도를 통한 인격의 회복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표현 방법이다.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인격체로서의 권리이다.


자신을 표현하며, 표현된 내용이 존중을 받을 때 비로서 진정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존중받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성숙된 기도는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교회 공동체와 인격의 회복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 공동체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격체로서 구현되는 곳이다.


설교와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존중받는 인격체로서의 활동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인격체의 성장을 위해서 성화라는 성장 과정이 요구된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인격체의 성장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았기에, 신앙생활은 회복된 인격체로서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가 사회에서도 모든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만 한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의 인격적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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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부활 2018. 1. 3. 12:38

그리스도의 부활과 안식



Paul Kim (penthos7@naver.com)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처음 아담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되어질 때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처음 아담과의 관계에서 해석되어질 때 좀 더 명확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진 에덴에서의 과제의 성취의 결과물이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에서의 요구는 한시적이었다.


이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요구가  한시적으로 재연된 것과 유사하다.


만약에 아담이 통치 명령 (창 1:28)과 선악과 금령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행하였다면 아담에게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실패하였다고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에덴에서의 목적인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취하셨던 안식이 이 땅에서 표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땅에서의 안식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나타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한다.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안식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오실 그리스도에 의한 안식을 예표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로서, 성취하신 안식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한 주권을 표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사역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 의하여 예표되었던 안식을 성취하시는 사역이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 성취되어야했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원래 에덴에서 목표하였던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에 대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후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은 이 땅에서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이다.


상실된 자들, 포로가 된 자들에 대한 해방을 선포하는 날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상실된 자이며, 사단에 포로가 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에게만 적용이 된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땅에서 성취된 안식을 근거로 이 땅에 희년을 선포하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인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으며, 밀 수확의 첫 열매를 드리는 칠칠절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 땅에 영원한 안식이 선포된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언약, 즉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이 이 땅에서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이 땅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이 땅에 안식을 선포하는 창조 사역이다.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으로서의 구원은 더 이상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의 행위의 요구는 이 땅에 임한 영원한 안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성령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는 참 이스라엘로서 역사적 이스라엘과는 구분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지만, 역사적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다.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부활하심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사도들에 의하여 새롭게 시작되어진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이다.


율법에서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인 그리스도의 안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부활을 통하여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가 있으셨다.


부활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느것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이 표현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안식의 성취로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이들이 생명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신자는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목적을 성취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요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부활로서 안식을 성취하셨다.


신자는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문화 명령)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대위임령)을 수행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야한다.


하나님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문화변혁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자에게 주일은 일주일의 시작이기에 일상이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이루어져야함을 인식하여야한다.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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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우울증, 그리고 안식


(이글은 성공이 가져다주는 허상과 부작용, 그리고 휴식과 충전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하여 정리한 글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긍정적인 면에서 비전을 갖게하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러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공한 자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하면서 성공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가기도하지만 이와 반대로 실패한 이들은 극단적인 반대 현상 가운데 살아간다.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의 공급과 방출이 필요하다.


성공은 그냥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며 이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기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한다.


성공한 이들은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기도하지만 그 가운데 부정적인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한다.


하나는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공을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비된 에너지의 공급에서 비롯된다.


에너지의 소비는 고통이면서도 쾌감을 가져다 주기에 한 번 맛본 이들은 이를 포기 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좋은 말을 듣는 것은 기쁨이되기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긴장감과 쾌감 사이를 교차하면서 과도한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엔돌핀과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쉼과 휴식을 통한 충전이 요구된다.


예전에 김연아가 벤쿠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곧 이어 개최된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7등을 하였던 것도 과도하게 분비되었던 엔돌핀과 도파민이 충전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라톤에 출전하였던 이들이 대회 후에 예외없이 우울증을 겪게되는 원리와도 같다.


이는 마라톤 전문가들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였던 이들이 한 달 이내에 다른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는 사람을 흥분하게해주며 쾌감을 주면서 사람들로하여금 의욕을 갖게해주는 중요한 삶의 원동력이다.


술과 담배도 마찬가지의 원리로 작동되기에 술과 담배에 중독된 이들이 술과  담배를 끊게되면 우울증이 오면서 심각한 금단 증상이 나타나는 원리이기도하다.


마약은 엔돌핀과 도파민을 일시에 분비시키면서 극단적인 환각상태에 빠지게 만들지만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를 조절하는 능력을 파괴시키기에 중독성이 강하고 치료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밖에도 엔돌핀과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방법으로는 게임과 투기, 도박등이 있다.


이들이 하나같이 중독성이 있는 것은 게임이나 주식투자, 도박등이 주는 긴장감에서 오는 쾌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경제 원리이면서도 마치 합법적인 카지노와 마찬가지로 중독성을 가져다준다.


주식 투자는 일상의 삶을 앗아가는 뿌리 깊은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환경을 박탈당하기에 주식투자는 신앙생활에 치명타라고 할 수 있다.


엔돌핀과 도파민의 적절한 분비는 일상에 활력을 주기도하지만 과도한 분비는 일상을 파괴시키기도 한다.


엔돌핀과 도파민의 과도한 분비가 요구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특별히 충전과 방출의 관계에 예민하여야한다.


제대로된 충전이없는 방출은 우울증을 유발하기에 일상에서 도파민과 엘돌핀의 과도한 분비를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많은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우울증에 노출된 직업들


세상의 많은 직업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연예인이나 의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과도한 에너지의 소비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성공한 이들이 우울증을 호소하면,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배가 불러서 고민할 것이 없어서 그런 고민하냐’고 핀잔을 준다.


이는 우울증이 정신적인 문제 이전에 육체적인 문제에서 유발되는 심각한 질병임을 간과한 것이다.


연예인들은 모든 일상이 공적으로 노출되기에 과도한 긴장감에서오는 방전에 비해서 충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의사들과 같이 사람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해소를 위해서 골프나 레저활동, 술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골프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골프는 햇볕을 쬐면서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에 의사들이 선호하는 방법이 되기도한다.


술은 또 다른 엔돌핀과 도파민을 분비시켜서 환자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로부터 기분을 전환시켜주지만, 충전의 역할이 아니기에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실패한 이들도 엔돌핀과 도파민의 과도한 분비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소모를 보충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좌절은 많은 충전을 요하지만 사회는 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육체적 회복 못지 않게 정신적 회복의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신앙생활을 많은 도움이 되며 여러가지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수면과 휴식


사람이 취하는 수면과 휴식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적인 시간이다.


수면과 휴식에 대한 편견은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도한다.


충분한 수면과 햇볕 아래서 취하는 휴식과 적절한 식사는 소비된 엔돌핀과 도파민을 충전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예민한 사람들은 대부분 집안에만 있는다거나, 휴식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거나, 제때에 적절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울증을 유발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면서 주변환경을 바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우울증의 문제 해결이 쉽지가 않다.



우울증을 유발하는 현대사회


현대 사회는 공급이 왜곡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의 재료들은 농약, 유전자 조작, 항생제, 비닐하우스, 수입산, 인스탄트 식품, 조미료등등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있다.


환경 또한 마찬가지다.


도시 문화가 가져오는 시멘트 건축물에서의 유해 물질들, 미세 먼지, 산소와 음이온의 부족, 소음, 야간의 조명등은 제대로된 휴식과 충전을 방해한다.


낮과 밤이 바뀌고, 직장이 주로 건물 안에 있으며, 지하 공간의 확대에 따른 폐쇄된 생활 환경과 항상 경쟁 관계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 환경은 충전을 극소화시키며 방전을 최대화시키는 환경들이다,


더욱 큰 문제는 현대 사회가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공유의 시대라는 것이다.


좋은 것을 공유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정보의 왜곡과 객관적이지 못한 공유가 일반화되어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정보는 이미 다 노출되어있기에 어느 누구도 숨을 곳이 없으며, 특히 사회적 공인이 된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유혹의 길


부정적인 요소가 가득한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모른다기보다는 돌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다.


한 번 대열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기회는 쉽게 다시 오지 않는다.


현대인은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나도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 안에 있으며, 이는 자신의 의식 구조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 주어진 부와 명예는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쉽게 포기 할 수가 없다.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이 자살률이 높은 것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요구에 비하여 자신의 능력이 받쳐주지 못할 경우에 후퇴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벌그룹에 속해 있는 이들이 많은 부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와 명예에 중독된 이들은 자신의 역량의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높아지고자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과도하게 소모된 엔돌핀과 도파민을 다시 채울 수 있는 지식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기에 필연적으로 우울증이라는 증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야만하는 성공한 이들의 비참한 그늘이다,


이들은 실제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요구되어지는 사회적 요구를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의 부족함을 호소하거나 해결할 수 없을 경우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한다.


진정으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사회에서 성공한 이들이라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울증과 신앙생활


엘리야도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하루 종일 싸운 후에 놀라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협박으로 도망을 간 후에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먹이면서 엘리야가 회복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승리와 성공에 따르는 과도한 소모로 인한 우울증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주는 말씀이다.


휴식은 소비가 아니라 마치 방전된 밧데리를 충전하는 것과 같다.


연예인이나 의사등 소위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많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단지 배부른 고민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사가 목사에게 힘든 문제를 상담하니까, 그 목사는 자기는 힘들어도 좋으니까 돈이나 실컷 벌어봤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기 힘든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이 실제의 현실이다.


청년들과 노년은 충분한 식생활이 보장이 되지 않는 관계로 우울증에 쉽게 노출된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누구나 높아지고자하는 욕심과 부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지식과 관리가 없으면 내적으로 피폐해지면서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어있는 존재들인 아담의 후손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필요로하는 휴식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영원한 안식은 창조주와의 완전한 관계 회복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휴식은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과 안식을 예표해준다.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 휴식은 근원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잠깐의 육체적 휴식은 우울증에 대한 치료가 될 수는 있을 지라도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한다.


우울증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곡된 경제 구조는 마치 인간이 경제 활동이나 성공을 통하여 안식을 취할 수 있는 허상을 제공해주지만, 성공의 결과는 인간을 더욱 우울증의 늪으로 빠뜨린다.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 활동을 마치시고 취하신 것이다.


아담에게도 안식을 위한 에덴에서의 역할이 요구되었지만 반역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성취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성취하셨기에 안식의 주인이 되셨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성취 위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이 주일인 것은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안식에서부터 출발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패망이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역할을 하였듯이,우울증은 인간에게 참된 안식이 없음을 인식하게 해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근원적 안식으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세상이 사람들에게서 휴식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그림자를 없애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왜곡시킨다.


세상은 사람들로하여금 무엇인가를 성취하게끔하여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꿈을 제공하지만 그 실상은 허상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교만을 비롯한 내면의 피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한다.


성공한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목회자는 세상에서의 성공이지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 아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큰 교회 가운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목회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 목회자는 성도들을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있다.


성도가 교회에서 하는 충성 봉사는 안식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근거로해야한 것이다.


성도는 교회 생활이 또 하나의 성공을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의 삶에 성공이란 것은 없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에게만 참 생명이 주어질 뿐이다.


자아 성취를 위한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를 소외시킬 뿐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을 소외시키면서 인간에게 허상을 제공해줄 뿐이며, 성공한 이들은 유혹에 속아 헛된 야망과 씨름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지만 세상은 재미와 쾌락만을 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기쁨을 주시려고하지만 세상은 표면적인 만족을 줄 뿐이다.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우울증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절망과도 같아야한다.


우울증이 그리스도의 안식으로 인도된다면, 우울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참된 안식은 은혜를 근거로하기 때문이다.


수면과 휴식도 안식의 한 원리에 속하는 일반 은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낮에 햇볕을 쬐고 충분한 영양식을 섭취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일반 은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이라는 특별 은혜로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도 안식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하든, 우울증을 겪든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으로 인도되어야만한다.


진정한 성공은 안식을 누리는 삶으로서 하나님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안식을 위한 과정이 하나님같이 높아지고자했던  욕심으로 실패하였듯이, 성공에 대한 욕망은 타락한 죄인이 가지고 있는 높아짐에 대한 왜곡된 현상일 뿐이며, 진정한 길은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들어선 길은 더욱 더 어렵고 복잡한 길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성공에 대한 결과는 교만으로 연결되어 패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교만하였으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교만을 지속적으로 책망하셨다.


신자들도 택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면 안된다.


성도는 교회 생활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공했다고하는 유명한 목회자들이 하나같이 타락의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공에 목메달지도 않는다.


성공한 이들의 가장 큰 불행은 교회를 성공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다.


참된 목회자는 안식의 터전을 자신의 성공의 터전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성공한 목회자들이 자신의 욕심으로 교회를 훼손시키는 것은 이들이 진정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인지 의심해보아야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우울증에 대한 근원적인 치료책을 제공해주는 곳이 되어야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없는 안식을 제공해주는 곳이 되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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