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21. 10. 13. 20:17

요한복음 1장 11절에 비춰본 톰 라이트의 거짓말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들

 

새관점주의자들은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항하는 행동 방식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3가지 유형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로마와 타협하고 아부하며 빌어붙어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다.

 

두 번째는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숨어사는 도피자들이다.

 

세번째는 로마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열혈주의자들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세가지 유형이 전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대변해준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할지, 희생적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은 로마였으며,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로마에 희생 당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예수는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를 자기 백성, 즉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2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있다.

 

예수는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이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

 

행위가 요구되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며, 새관점의 예수는 안식의 주인이 아니며,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왜곡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를 유대교 친화적으로 바꿈으로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기독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새관점과 홀로코스트

 

예수를 로마인이 죽였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결코 현대 유대인들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새관점은 유대주의적인 노력이 많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http://www.reformanda.co.kr/theoJournal/98428)

 

새관점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있어왔던 여러 자유주의학자들의 주장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적 관점들과 성경신학적 관점들이 성경 자체를 근거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새관점은 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한 1세기 제2성전 유대교”, “슈바이처의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라는 3가지가 주된 틀로 구성되어있다.

 

새관점의 출현의 배경에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이 있다.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의 예수에 대한 해석을 취합하여 새로운 의를 산출해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새관점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복음을 유대교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최소화시킨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삼위일체적 예수라고 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 된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가 로마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려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하나님 나라 백성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있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을 강조하며, 신약의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실 때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다.

 

어둠과 빛, 주검과 생명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이시며, 연장과 확장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가 없는 단절된 반대의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표면적인 개념이다.

 

이면적으로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만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만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 주장들은 기독교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거짓된 결과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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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1. 10. 13. 20:13

요한복음 1장 11절을 통해본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오류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 신정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 실은 잘못된 관점인 것이다.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명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성당의 벽화에서는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의 벽화를 통해서 교회 차원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지속하기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유대인 핍박에 대한 표면적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타이틀을 걸기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러한 명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도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상처였으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바꾸지 않고는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을 들 수 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유대주의적으로 바꾸면서, 율법주의를 신율주의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따름의 대상으로,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구원론 등을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시도들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관점은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 11절을 묵상하며 살펴보고자한다.



창조주의 주권을 위한 언약공동체

 

예수를 죽였다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덴 공동체는 타락 이전의 공동체였지만, 타락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 공동체의 특성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에덴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다.

 

타락 이전의 에덴에서 주어졌던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졌던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거하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도 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단순한 소유권의 행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릴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임함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한 조건적 축복으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렇게 위임을 받고 형성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며, 에덴은 최초의 언약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 후에 만들어진, 처음 언약 공동체였던 에덴의 재연이었다.

 

처음 에덴공동체에서의 아담이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산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인류를 대변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성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분리된 가운데 임하셔야만 했다.

 

언약공동체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서 분리를 전제로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거절을 당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에덴은 타락을 수용할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불순종한 아담에게는 거주가 허락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하지 못하였기에 거룩하신 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었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절을 당하셨던  곳이었으며, 거룩이 상실된 곳이었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이 땅에서 에덴은 상실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사람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에덴 성전은 순종이 요구되었던 곳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순종이 완성된 곳이다.



언약 백성의 대표성

 

에덴에서의 아담은 최초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었다.

 

아담의 역할은 순종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저주를 가져왔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유지,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온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온전하게 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공동체가 살아가는 자기 땅에 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인류의 범죄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민족의 범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죄성이 어떠한 가를 대표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어둠은 알지 못했으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구약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는 포도원 지기들이 포도원 주인을 거부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이 유대인들만의 죄악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사역은 유대인들에게만 유효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희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였으며, 예수의 죽으심으로만 처음 아담의 범죄에 대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가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처형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제한된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예정된 자의 구원은 대표성 안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에 대한 배척은 정당한가?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변해준다.

 

에덴이 창조 세계를 대표하였듯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였다.

 

유대인들은 모든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특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변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는 존재이기에,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시키거나 차별화시켜서는 않된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여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자신들의 죄가 아닌 유대인들만의 죄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였고, 급기야는 홀로코스트라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교회는 유대인 박해의 주체가 되기도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오셨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의 죄악으로 돌아가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었고, 신자는 둘째 아담 안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의 표현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참 이스라엘이시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에 숨었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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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20. 3. 5. 22:14

동거문화에 대한 신학적 단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헬조선이라는 한국의 상황은 젊은 이들의 혼인에 대한 관점마저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결혼을 앞둔 젊은 층에게 동거는 헬조선에서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 예식의 비용은 둘째치고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갖지 않을 바에는 꼭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에 들어가기 보다는 동거가 더욱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경제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거는 결혼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꼭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 법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국에 비하여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거 문화가 법적으로 보장되었고 이미 사회속에 하나의 제도로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나라들도 있다.

 

법적인 뒷받침이 없는 한국에서의 동거는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을 안고 가야하는 불편한 생활방식이겠지만  서구 사회의 동거는 이야기가 다르다.

 

동거 문화는 포스트모던 서구 사회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동거하는 가운데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법적인 보장과 국가로 받는 혜택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에 대한 것과 차이가 없기에 동거하는 당사자들에게 자녀는 더이상 동거 생활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거하는 당사자들은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법적인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식을 할 필요도 없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유지할 때는 이혼이 자유롭지 못한데 반하여 동거는 언제든지 당사자의 합의 하에 서로가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다.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이 합의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다.

 

동거문화의 보편성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편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결혼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이 원할 때 결혼식도 가능하며 법적으로도 등록이 가능하다.

 

결혼과 동거의 주된 차이는 경제문제와 서로에 대한 책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거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합의하에 동거에 필요한 재정을 일정 부분 분담하면 된다.

 

서로가 상대의 경제권에 대해서는 간섭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자신의 독립적인 시간을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즐길 수가 있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하여도 간섭할 수가 있는 권리가 없을 경우가 많다.

 

간음죄라는 개념도 없으며 외도를 한다고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이 동거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결혼은 상대방에 대하여 담당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에 대하여 재산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본다.

 

루터는 죄인으로서 필요한 외부로 부터의 “낯선 의”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혼인법에 비추어 “행복한 교환”(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성화, 균형있게 이해하기 p55)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 당시는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할 때 법적으로 신랑의 모든 소유가 신부의 소유가 되고 신부의 모든 소유가 신랑의 소유가 되었다고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결혼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러한 “행복한 교환”이라는 틀이 유지되고있다.

 

대신 동거 문화에서는 “행복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거 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수 없고 다만 필요에 의한 거래를 할 뿐이다.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가 신랑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혼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근원적인 죄인이기에 죄인이 거룩하신 분과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서는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소유에 있어서 피차간에 교환이 일어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내면의 근원적인 죄, 그리고 죄의 잔재들은 그리스도가 가지고 가셔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으로 해결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소유하게 되어 의인이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됨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혼인관계를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중 전가의 개념이 바로 혼인 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행복한 교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동거 문화는 결혼이 담고있는 귀한 성경적 원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결혼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문화가 동거 문화로 바뀌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변화가 있다.

 

포스트모던 신학 가운데 하나인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전가 개념을 배제하기에 “행복한 교환”이 배제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동거 문화와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혼인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새관점에서와 같은 요구와 조건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행복한 교환이 있어야한다.

 

전가 교리를 귀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전가 교리의 유비적 형태인 행복한 교환이 없는 동거 문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동거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결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하는 교회는 동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제대로 말 할 수 있어야한다.

 

동거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상은 필요에 종속된 욕심으로서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청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혼인 관계는 필요를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한다.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혼인 관계는 우리가 파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은 올바른 결혼 문화를 통하여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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